흰 벽과 충분한 햇빛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by 지플레르

제가 즐겨보는 홈카페 영상에서 본 '흰 벽과 나무 테이블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문구는 '감성'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감 가는 말인 듯합니다. 꽃을 만들다 보면,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요즘같이 SNS를 통해 많이 것들이 이루어지는 시대엔 사진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작업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특히 꽃은 햇살이라는 조명과 넓은 벽이 있으면 참 좋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저의 작업실은 아침부터 해가 잘 들지 않으면서, 해가 드는 창가 쪽은 모두 통유리라 벽이 없습니다. 필로티 구조로 되어있는 건물 1층에 위치한 저의 작업실은 주차장 한편을 막아 만든 공간으로, 통유리 밖으로는 주차된 차들밖에 보이지 않죠.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갑자기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가 절실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카메라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편집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작업실 자체이기도 하고, 가끔은 애꿎게 남편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유튜브 영상을 찍으면서 한동안 작업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갔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구독자수가 팍팍 늘지 않는데(결과적으로는 불성실한 업로드 때문이었지만) 영상이 예쁘지 않아서 인 것 같았고, 그 이유는 dslr카메라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카메라를 사면 영상의 용량이 높아지니 휴대폰으로는 어림없고, 편집 프로그램을 노트북에 깔아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컴퓨터는 사양이 너무 낮아, 편집 프로그램을 돌릴 공간이 없었고, 그러면 데스크톱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럼 편집도 배워야 하고, 기왕이면 예쁜 공간에서 찍고 싶으니 이건 작업실을 옮겨야 하는데, 고양이를 혼자 오래 두기 싫어 집과 작업실을 함께 옮겨야 하다 보니 그럼 이사를 가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요즘 떡상을 눈앞에 둔 어느 유튜버가 장비에 천만 원을 썼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0이 하나 더 붙을 뻔했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제 얼굴이 예쁘게 나오는지 아닌지 관심이 없습니다. 조명 아래에서 찍던, 어둡던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이지 영상이 아니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내 만족이 되질 않으니, 어느샌가 띄엄띄엄 올리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뭐 계절에 하나씩 올리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내 채널은 점점 비어가는데, 다른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 이 사람은 영상미가 좋고, 어떤 사람은 편집이 좋고, 어떤 사람은 날 것 같은 영상이지만, 그 나름의 편안함이 있고, 잘되는대는 다 이유가 있다고 내가 안 되는 이유는 백가지, 남이 잘되는 이유도 백가지입니다.

솔직히, 이게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초조해하며 사봐도, 결국 그걸 별로 사용하지 않는 저를 스스로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마, 햇빛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해도, 넓고 멋진 흰 벽이 있다 해도 갑자기 없던 성실함이 생기진 않겠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생기는 불안감을 지금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에 책임을 전가해서 모든 원인을 그곳에 묻고 싶은 것이란 걸 압니다.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어설프게는 시작도 하지 말자는 강박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것도 사실 최근에 명확하게 알았어요.

이 작업실에서 10년 정도 지냈고, 그 사이에 많은 프로젝트와 일들을 해왔습니다. 흰 벽과 충분한 채광이 없었어도요. 요즘들어 자꾸 크고 넓은 흰 벽이 간절한 걸 보니, 지금은 작업실에 없는 흰 벽이 제 마음의 임시 피난처인 것 같네요. 늘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조바심에 불안한 마음이, 잠깐 숨어 쉴 수 있는, 넉넉한 뒷공간을 가진 흰벽 뒤에서 지친 마음을 다독여줘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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