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열매 Apr 19. 2023

사람, 또 사람


시작하며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어요. 요즘 저는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를 정겨운 겨울용 길거리 간식을 위해 주머니 속 3천원을 항상 챙깁니다. 일상의 작은 기쁨 꺼리들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인거죠. 작지만 구체적인 기쁨이 주는 단단함이 좋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껴요. 그동안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보고 듣고, 또 해온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말과 글에 저 자신이 먹혀버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꿈과 기대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이야길 많이 하잖아요, 지금이야말로 그럴 때가 아닌가 싶어요.



조직의 문제, 사람의 문제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소 공식적인 자리나 대중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요, 그를 2015년에서 2017년에 걸쳐 네 차례 깊이 있게 인터뷰한 가와카미 미에코와의 인터뷰를 담은 책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부터 그의 철학까지를 두루 다룬 인터뷰집이었는데요, 부조리에 대한 증오를, 싸우는 행위 자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 부조리에 맞서는 순수한 분노의 발로였던 것이 점차 운동과 운동의 싸움, 숫자와 숫자의 싸움, 당파와 당파의 싸움, 전략과 전략의 싸움, 표층적인 말과 말의 싸움 같은 것으로 변질되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의 생각 따위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죠. 싸운다는 행위 자체에 잠식되고 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실망이랄지, 환멸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표층적인 말에 대한 불신은 지금도 남아 있고요. 그런 말을 전부 빼버리고 소설을 쓰려고 하니 일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죠. 그러지 않은 사람도 물론 많겠지만.
물론 저도 무언가와 싸워야 한다는 건 잘 압니다. 사람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죠. 안 그러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뿐이니까요. 그러나 이 거대한 정보사회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싸우겠다고 결의한들, 그저 소비만 되고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91쪽


싸운다는 행위 자체에 잠식되어버리는, 그런 경험들 누구나 한 번쯤 하지 않으셨나요? 끊임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지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개념화와 담론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것보다 이를 엮고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갑니다. 지역에서 협동조합을 통해 지역사회의 필요를 충족하고, 사회적기업이나 소셜벤처를 통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사회적 가치와 연결해 활동하고, 그게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요. 활동을 고민하고 조직하고 부딪히는 그 모든 과정을 담고 있는 사람, 그걸 ‘한(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구나 싶어요. 


어느 조직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그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행위일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의 메일 한 통, 전화 한 통, 회의 한 번,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메모를 하는 등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고 그게 조직을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니까요. 조직 전체를 본다는 건 한 사람을 본다는 것이 아닐지, 결국 사람 또 사람의 문제가 아닌가 싶더라구요.



지속하는 힘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제게 살짝 버거운데요(그래도 이번에 나온 <헤어질 결심>은 챙겨봤습니다만...�) 인터뷰 기사는 꼭 챙겨 봅니다. 여러 매거진에서 에디터, 피처 디렉터로 활동해 온 윤혜정의 인터뷰 모음집에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가 있어요. 인터뷰어는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생각만치 간단한 건 아닐 텐데, 감독 입장에서 다른 훌륭한 감독들의 재능 중 부러운 부분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어떤 특정한 비전을 갖는 것까지는 나도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를 구현할 때 대규모의 자본과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기에 그들이 모두 나의 비전 안에 들어와야 하잖아요?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각자 스스로의 비전이라 여기고 동참하도록 하는 거, 그게 독특하고 과감한 비전일수록 어려워지는 거죠. 그렇게 만드는 능력이 내 입장에서는 늘 부러워요. 아리 애스터나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그런 사람이겠죠. 어떻게 저렇게 이상한 걸 시키지 싶은 것을 배우들이 하는데, 정작 배우들은 행복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까. “그 감독 이상해요, 막 이상한 거 시켜요” 그러질 않고." -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중


영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일은 다른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뛰어난 누군가가 혼자서 뚝딱 해결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함께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목표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어떻게 독려할 수 있을지가 모두의(특히 리더의) 관심사죠. 지속하는 힘을 각자가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요. 내가 직접 일을 만들어간다는 책임감이 없다면 안 되잖아요. 특히나 협동조합이 그렇고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누군가는 명예를, 돈을, 또 성장 그 자체를, 아니면 함께 무언가 만들어가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 그 자체에서 지속하는 힘을 얻습니다. 모두 다르지만, 같아야 하는 건 그렇게 내가 속한 조직이 만들어가는 가치가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아닐까요? 그런 기대가 있어야 남다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서로 다른 우리가 조직 안에서 개인의 목표보다는 조직의 미션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것,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정해가는 과정 속에 가능하겠죠. 결국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지속하는 힘의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6월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뒤 박찬욱 감독은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중 아레나에 실린 인터뷰가 흥미로워 링크를 공유합니다. 박찬욱 감독에게 무엇을 믿느냐는 질문을 던졌는데요, 그는 "디테일에 모든 게 있다. 모든 창조적인 대화, 실질적인 업무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데이터에서 출발해야 해요. 이를테면 내가 정서경 작가나 류성희 미술감독과 앉아서 “이 영화의 주제는 뭐지” 이렇게 출발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보단 “이 커피잔은 무슨 색이지?”가 괜찮은 시작이죠. 배우들과 이야기할 때도 “이 사람은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넥타이를 매는 타입이에요”라고 하는 식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디테일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 더 깊이 사람의 내면을 다루지 않았나 싶어요.



오늘의 논문은

2007년 한국민족사운동사연구에 실린 <어느 농촌운동가의 생애와 1950~1960년대 농촌근대화운동>입니다. 


사실 오늘 논문은 요약보다는, 논문 전문을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싶어요. 이재영이라는 한 농촌운동가의 생애사를 통해 1950년부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나타나는 맥락을 짚고 있습니다. 연구자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의 삶이 결코 고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애사 연구는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갖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운동가로 성장한 이재영이라는 한 개인의 삶은 결코 그만의 특수한 경험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곁에는 '동지'들이 있고 직접적으로 관계맺지는 않았지만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친 정치가나 사상가들이 있으니까요.


1961년 농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된 뒤, 농촌운동가들이 정식 농협직원은 아니지만 농촌 현장에서 실무적인 일들을 맡는 '농협개척원'이라는 이름으로 박정희 정권의 농촌정책에 흡수 또는 협력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이재영은 농협이 부여한 개척원의 역할을 형식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농협운동은 비밀리에 추진합니다. 농민들의 실제 가계실태를 조사하는데, 이를 통해 농가경제의 개선 방향을 마련하려 합니다. 혼자 2천호가 넘는 농가 조사를 할 수는 없었죠. 농촌의 현실을 정말 바꾸고 싶었던 또 다른 청년들이 지역에 있었기에 이들의 도움 속에 활동을 펼칩니다. 


연구자는 "무명의 많은 농촌실천가들의 삶을 역사 속에 복원하고 드러낼 때 해방이후 농촌사는 정책사에서 벗어나 역사의 실상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맺음말을 적었습니다. 지금 당장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의 실험들이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고, 그들이 있기에 변화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결국 사람..사람이 중요한 거겠죠. 참, 다음주 금요일과 토요일(9~10일) 충북 청주 자활연수원에서 <2022 사회적경제 활동가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직 신청 중이더라구요. 사회적경제 현장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다면 눈여겨 봐야 할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11월이 마무리되고 12월이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였습니다. 이제야 2022년이란 숫자에 익숙해졌는데 12월이네요. 그래도 아직 한달여 남았으니 미처 해내지 못한 올해의 계획을 부랴부랴 챙겨보려 합니다. 역시 마감(..)이 있어야 의지도 생기는 것 같아요. 얼마 남지 않은 2022년, 원하고 바라는 바 다 이루시면 좋겠습니다.



2022년 8월부터 격주로 발행 중인 <오늘의 논문> 뉴스레터의 내용을 다시 싣고 있습니다.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가능합니다 :)

https://diveintocoop.stibee.com/


작가의 이전글 공동체는 무엇일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