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고백하건대 최근 3주간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연구는 물론이고 운동, 인간관계, 취미생활 등에 별 의욕이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았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원래 무언가 잘 안 풀리고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아예 던져 놓지를 못하는 성격이라서, 꾸역꾸역 제 일상을 지탱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래 왔듯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 그 버팀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최근 새로이 알게 된 지인과 밥을 먹었는데 그분께서 제 텐션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연히 텐션을 높이라고 강요하려는 의도는 아니셨고, 저 또한 연구적으로 꽤나 오랫동안 머리 아팠던 문제를 고민한 직후의 만남이라 다소 기분이 굳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상대를 알아 갈 생각에 설레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사람이었는데 그러지 않는 듯한 당시의 제 모습이 많이 낯설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무언가를 잘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슬럼프를 넘어서 가벼운 우울함이 다가오는 순간이었죠.
아직까지도 그 우울함이 다가온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짐작을 해 보자면 스스로에게 익숙한 제 자신의 모습이 옅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오는 일종의 허무함이었던 것 같아요. 무엇을 위해 제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지금 이곳에서 학위과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은 변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장점이자 뚜렷한 색깔이라고 믿었던 모습이 사라지니 많이 당황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찌 됐던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고민과 가벼운 우울을 반복하여 마주하던 중, 오늘 잠시 학교를 크게 벗어나 다른 장소에서 간간히 보던 지인을 만나 밥을 먹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주말은 필연적으로 회복을 해야 하는 시간이라,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등의 에너지를 쓰는 것은 일종의 도박입니다. 제대로 된 기분 전환이 된다면 상관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저 피로감만 쌓일 테니까요. 그래도 모처럼 만에 보는 지인이라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움직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큰 기분 전환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요.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지인은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어요. 바쁨과 고민이 없었던 분은 아니었으나, 제가 만난 오늘이 운이 좋게도 그분이 여유와 밸런스를 기분 좋게 찾은 시기였더라고요. 참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일상과 현재 시기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또 편안해지는 일이 있을까요? 더불어 만나는 장소가 잔잔하고 좋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머물러 있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의 환기도 예상치 못하게 얻은 셈이 되었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리고 그분의 차분함과 여유로움을 느끼며 어쩌면 제가 그동안 겪었던 감정은 슬럼프가 아니라 차분함이었고, 슬픔이 아니라 낯섬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뚜렷한 문제가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건데, 대학원 이전에 행적들이 워낙 다양한 자극을 추구했다 보니 상대적으로 많이 차분하고 낯설어서 당황했던 것뿐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면 대학원에 오면서 얻고자 했던 능력치 중 하나는, 저와 굉장히 안 맞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차분함이었거든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체화하는 것에 대한 나름의 고충이 지난 3주간의 다소 오묘한 감정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쁘지 않다고 해서, 무언가 느낄 만한 것이 없다고 해서 슬럼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전하지 않더라도 나의 노력으로 인해 크게 부족함 없이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차분함에 가까운 것 같아요. 어쩌면 슬럼프와 차분함은 그 경계가 정말 모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그 순간을 스스로가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될지도 모르는, 온전히 제 자신에게 달린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 차분함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다소 낯설긴 하지만, 이 기분도 꽤 나쁘지는 않은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