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만 마치고 박사를 하지 않는 이유
2021.11.06
취업을 위해 회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주변에 석사만 마치겠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꽤 많은 분들이 박사를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물어보십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유를 이야기하면 '이왕 시작한 공부 박사까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냐', '박사 받으면 나쁠 것 하나 없다', '너도 하면 박사 받을 수 있다' 등등의 회유 같은 격려를 듣기도 해요. 그래도 석사까지만 마치겠다는 지금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저도 박사학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마음이 그렇게 많이 기울지 않거든요. 생각해보니 글에서도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간접적으로 많이 비추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왜 그런지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없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상세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바라보는 박사과정은 연구라는 분야를 배우고 해당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어디까지가 되어야 박사를 받느냐라는 궁금증이 생기는데, 이건 정답이 없고 개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를 거예요. 다만 제가 느끼는 제 연구실에 기준은 꽤나 높은 편이고, 저 또한 긴 시간을 쏟아붓는 만큼 그 정도 수준을 목표로 해야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세계 최고 수준을 100이라고 한다면 못해도 90까지는 올라가기 위해 애써야 하는 기간이 박사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높은 기준을 목표로 한다면 단순히 시간을 쏟아붓는 것을 넘어서 반드시 결과물로써 연구능력을 증명해내야 만합니다. 그렇기에 한 개인의 에너지 또한 정말 많이 투자하게 되는데, 사람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다른 감정들이나 경험들은 소외될 가능성이 높죠.
저도 여러모로 기준이 높은 사람이라 박사과정에 느끼는 매력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정도와 방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박사과정은 한 가지 방향으로 90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인데, 저는 다방면으로 75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참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박사과정을 하면서 제가 연구라는 한 방향으로 90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부분들에서 75 이상을 유지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글들에서도 이야기해왔던, 공학이라는 분야에서의 연구에 대한 저라는 사람의 기질과 역량의 한계인 것 같아요. 그럼 90이라는 기준을 낮추어 다른 것들에 분배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그건 또 싫습니다. 박사로서의 역량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안 하고 다른 것을 찾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90 이상의 능력치를 갖춘 박사만 박사로 인정하겠다는 주제넘은 생각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박사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충족해야 할 기대치가 그렇게 높은 뿐인 거죠.
더불어 제가 90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방향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따뜻한 감정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것이 박사과정에서 하는 연구와 다른 점은 90 이상을 추구한다고 해서 다른 방향들이 소외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이 잘 충족이 되어야 90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좋은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실무적 경제적 능력, 사회적 평판, 문화적 자본, 그리고 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함 등등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 도달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 큰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스스로가 알고 있기에 박사과정에 깊게 몰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셈이죠. 물론 또다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도 제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바라본 저의 역량과 감정들로는 그러게 정말 쉽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설령 실제로 나중에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더 잘 누릴 수 있을지 언정, 지금의 저로서는 그 가능성에 의심이 많고 마음이 많이 지쳐 있는 상황이라 박사과정을 선택하지 않고자 합니다.
석사만 마치고 회사로 가려는 것은 연구 이외에 제가 원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면서도 90 이상의 능력치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업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배팅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일을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이런 배팅이 익숙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제가 경험해온 것들과 앞으로 사회에서 겪을 것들을 잘 엮는 것이 연구보다는 승산이 높을 것 같다는 직감도 있습니다. 단순히 대학원을 떠나면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하면서도 낭만적인 기대는 사실 없는 것 같아요.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않는 것은 그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며 제 자신을 더 잘 알아 가고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심지어 다시 박사과정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혹시라도 그때를 마주하며 후회를 한다면 지금의 제가 선택한 이 결심을 기억하며 다독이면 될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