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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 Sep 04. 2023

천재는 남의 것을 훔친다

모방도 재능이다

  빛의 시어터에서 진행된 '달리 & 가우디' 전시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소개로 함께 방문한, 생애 처음으로 도슨트의 해설과 함께한 전시였어요. 해설이 없었다면 작품들을 소개하는 미디어 아트의 화려함에만 주목할 뻔했습니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의 의도, 그리고 적절한 이야기까지 가미된 해설은 전시를 오롯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앞으로도 전시를 가게 된다면 가능한 도슨트와 함께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해설 덕분에 작품을 넘어 살바도로 달리라는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기존의 작품들을 자주 모방했던 달리를 천재라고 부르는 게 다소 의아했어요. 그런데 설명을 들을수록 그 호칭이 납득되었습니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명언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달리가 분명 다른 작품들을 모방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달리의 작품으로 인식한다는 도슨트 님의 해설이 결정적이었어요. 이렇듯 모작이 아니라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정에서 달리만의 뚜렷한 생각과 철학을 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저는 창조보다 모방에 익숙한 사람인데 그런 모습이 열등하다 생각했거든요. 공학자로서 지금 하고 있는 제품 개발보다는 연구가 더 우위에 있는 행위라 생각했습니다. 머리로는 다른 영역이기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죠. 개발은 시간을 들인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연구는 새로운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특별한 행위라 생각했습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1들을 모아 10을 만드는 행위보다 0에서 1을 만드는 행위에 더 가치가 있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구를 잘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제가 공학자로서 열등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모방을 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것을 창조하는 게 더 가치 있다 말하는 보통의 예술처럼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달리의 작품과 생애가 힘차게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무엇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느껴졌습니다. 중요한 건 얼마만큼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 뿌리를 둔 자신감과 배짱을 가지며, 나만의 철학을 날 세워 남들이 할 수 없는 고유한 창조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였습니다.


  저는 기존의 생각과 지식들을 빠르게 습득하고 그것들로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기 좋아합니다. 여기에 연구와 같이 0에서 1을 만드는 거창한 창조는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기존의 것들을 모방하여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달리처럼 저만의 시각을 담아야만 합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창하게 누군가를 환골탈태시키거나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야망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창조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제 고유의 생각들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무엇을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에, 모방과 창조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어요.


  달리는 부와 명예를 비롯한 많은 것들을 누렸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과도 첨예하게 토론할 줄 알았고, 자신이 유일한 존재이자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보였던 매력적인 예술가였습니다. 타고난 재능 덕분도 있었겠지만 생애 동안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던 투지가 그 비범함의 원천이 아니었을까요? 다소 혼란스러웠던 생각에 짙은 영감과 희망을 선물해 준 소중한 전시였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비범하고도  감명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감사했던 하루기도 했고요.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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