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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 Sep 11. 2023

내가 만든 기술이 사람을 죽인다면

공학자로서의 무게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습니다. 3시간 동안 휘몰아치는 내용이 피곤하긴 했지만, 공학을 한다면 공감할 만한 고뇌와 서사를 접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공감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고 한 과학자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담았다 보니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했어요. 저는 체력적으로 약간 부담되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짙은 감정과 생각을 던져준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공학은 그 법칙을 응용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업으로 삼으면서 세계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던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핵무기에 사용되는 법칙을 발견하고 응용했던, 과학자와 공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가 무기를 만드는 것에 기여했다는 거였죠. 과학자나 공학자가 하는 일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어떨까요? 그 발견과 발명은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할까요? 과학자나 공학자에게는 책임이 없을까요?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니 새로운 것을 제시한 것까지만이 그들의 본분이었다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저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공학자인 제가 쉽게 피하기 어려운 질문들을요.


  저는 지금 수술로봇을 만들고 있습니다. 핵무기처럼 국가 단위의 파급력을 갖지는 않아도 분명 한 사람의 목숨과 얽힌 기술을 다루고 있죠. 이것에 대한 부담감이 커서 처음에 회사 합류 여부도 심각히 고민했었습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일정상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일수록 부담감은 더욱 커집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과 로봇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까? 그런 일은 발생하기 어렵다 말할 수 있도록 수많은 가능성들을 모두 검토했나? 만약 사고가 발생한다면 나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버그를 발견하거나 실험이 실패할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지금의 기술이 제품으로 출시되기까지는 아직 오랜 시간이 남아있음에도 말이죠.


  하지만 공학자로서 부담감에 짓눌려 도전하지 않는다면 기술을 세상에 내놓아 가치를 전달할 수 없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복잡해지는 프로그램과 테스트를 두려워한다면 만들어낸 소프트웨어를 안전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알 수 조차 없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겠죠. 한없이 무력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공학자로서 떳떳할 수 있을 기준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 가치를 만들고 그것이 이롭게 행해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실패를 마주했을 때 무너지지 않는 것,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꾸준히 성장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지 않을까요?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채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나아가야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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