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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 Oct 09. 2023

좋은 엔지니어는 박사가 필요할까?

엔지니어의 본질

  학교 선배들과 함께 1박 2일로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운이 좋아서 일몰과 일출을 다 볼 수 있었어요. 날씨가 좋으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참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게 확실합니다. 큰 생각 없이 긴 시간을 몸 쓰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가 비워져 좋았어요. 회사 일정이 너무 바빠 출근을 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다녀오길 정말 잘했습니다. 선배들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다시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즐거웠어요.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각자의 크고 작은 고민도 나누었습니다. 선배들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지만 모두 석사까지 마친 사람들이라 공감대가 꽤 강했습니다. 역시나 다들 박사 진학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했더라고요.


  박사 학위를 받으면 실력 있는 엔지니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엔지니어는 학문을 잘 이해해야 하고 박사 과정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학문을 파고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박사가 좋은 엔지니어는 아닙니다. 저는 공학의 본질이 사람에게 이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엔지니어의 본질은 그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고요. 학문과 연구는 공학의 일부에 불과해요. 박사과정의 본질은 유의미한 연구를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위한 훈련의 과정입니다. 제품 개발이라는 큰 범주가 아니라 그중 하나인 지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연구를 배우는 훈련말이죠. 그러니 박사를 받으면 취업하기 어려워지는 게 맞습니다. 좋은 논문을 엄청나게 많이 뽑아내고 있고 곧 박사를 받는 실력 있는 친구도 말합니다. 아무리 연구를 잘해도 본인의 연구 분야 그대로 취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요. 당연합니다. 연구는 매우 좁은 세부 분야로 들어가야만 하고 그 주제가 세상이 원하는 제품에 가까울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회사는 상품을 만드는 곳이고 연구자는 그 상품과 관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죠.


  저는 왜 석사 학위 중에 박사과정에 지원하지 않았을까요? 왜 지금 유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까요? 성장하고 싶어서, 그래서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무엇일까요? 일단 연구는 아니었습니다. 연구는 제가 추구하는 가치와 너무 멀었어요. 사람들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가치를 만들고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연구는 결이 많지 않았습니다. 피 말렸고 끝내 논문까지 출판해 낸 석사과정의 경험이 그것을 방증했습니다. 그걸 앎에도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니, 부끄럽게도 본질의 곁다리와 또다시 부풀려지는 껍데기를 욕심내는구나 싶었습니다. 해외 유명 학교에서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멋있잖아요. 굳이 내가 똑똑하고 잘한다는 걸 더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세상 폼나는 기회들을 모두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고,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배경을 바탕으로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도 사실이니까요. 분야가 맞지 않아도 과정에서 훈련된 논리로 제품 개발에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도 있을 거고요.


  다 맞는 말입니다. 박사가 한 사람을 표현하는 좋은 포장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는 논문으로, 엔지니어는 제품으로 말해야 합니다. 해내야 하는 일이 달라요. 좋은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면 학교가 아니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게 저라는 사람과도 결이 잘 맞아요. 과학과 기술이라는 언어와 도구를 통해 사람들이 진짜로 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니까. 심지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데 기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과학과 기술이라는 요소만을 위해 박사과정에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요? 현업에 남아있기로 해도 삶이 급격히 수월해지거나 배움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것은 운입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그것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겁니다. 그래야 운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본질을 외면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학문적으로 똑똑하기보다는 세상과 삶에 대한 지혜가 풍부하고 싶습니다. 겉에 쌓인 포장지가 무의미할 정도로 내실이 뛰어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많은 것들의 본질을 끝없이 고민하고 때로는 그것을 위해 달콤한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겠죠. 삶은 짧으니까요. 본질이 아닌 곁다리를 추구하기에는 허락된 시간이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으니까요. 오늘의 등산처럼 눈앞의 일들에만 파묻히지 않도록, 피곤해도 새로운 경험들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이 다짐을 잊지 않고 저답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하루를 꼬박 걸러 지리산이 깨닫게 해 준 이치는 결국 본질이었나 봅니다.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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