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주제를 고르는 게 제일 어렵다

2021.03.15

by 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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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연구실은 석사과정 학생들도 연구주제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좋은 것 같고 저도 처음에는 마냥 좋다고만 생각했는데요. 사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니까 망설여지고 고민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선택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연구가 갖는 특수한 어려움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연구 주제에서의 자유는 평소 생각하는 선택의 자유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연구실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연구는 진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측면이 가장 우선일 텐데요. 이 부분은 대학원 입학 전에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라 그리 큰 문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인 문제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할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연구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 기술적으로 현재 불가능하거나, 너무 모호하거나, 연구적으로 의미가 없는 주제를 생각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연구 주제를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도 연구라는 관점으로 문제를 좁혀나가는 과정이, 쉽게 말해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할 수 있기 위한 과정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연구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게 가장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연구자에게 필요한 능력 단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면 유의미한 문제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죠.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지는 그다음에 생각해도 괜찮다고 봅니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제시해도 괜찮을 수 있어요. 연구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으면 연구를 시작조차 할 수 없기에, 본인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해결되었을 때 의미 있는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의하고, 그 필요성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연구자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럼 이 능력을 단순히 흥미에 몰두하거나 논문을 많이 읽는다고 갖출 수 있을까요? 저는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에는 반드시 일정량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학부와는 달리 단순히 머릿속에 지식을 넣는 것만으로는 이 능력을 갖출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것만큼이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연구주제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처음에는 선뜻 제대로 된 주제를 고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일정기간 동안 연구주제를 잘 고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여기에 누군가의 지속적인 피드백이 더해져야만 점차 방향을 잡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렇게 방향을 잡아 주는 건 지도교수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도교수가 피드백을 주면 학생의 입장에서 그 피드백에 갇혀 자유롭게 연구주제를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주제를 고를 수 있는 자유만 제공하지 방향은 제공할 수 없는 거죠. 연구주제를 자유롭게 정하라는 기회를 주는 지도교수는 어디까지나 생각해서 가져간 주제에 대해 연구로써의 유의미함에 대한 판단만을 이야기해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는 연구주제를 어떻게 잡아 나가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논문을 읽고, 본인의 관심사를 점검하고, 들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을 꾸준히 정리하며 발전시켜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연구실 사람들과의 토의를 거치면 훨씬 더 빠르게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구성원들에게 말을 내뱉으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피드백을 들으며 부족한 점을 발전시켜 가기 때문이에요. 특히나 충분한 능력을 갖추어 연구적으로 좋은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고년차 선배가 있다면 그 선배와의 대화에서 정말 많은 걸 얻을 수 있습니다.


연구주제를 자유롭게 고른다는 것은 그만큼 연구가 즐거워질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동시에 처음에 방향을 잡기 매우 까다로울 가능성도 함께 높아집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난도가 높았기에 마냥 행운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정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동료들과 토의하는 과정에서 연구에 필요한 사고 과정을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지금의 저는 다행히도 그 배움을 어느 정도 습득한 거 같습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긴 하지만 지금 이 정도 수준까지 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분명 혼자서 골똘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오롯이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이 배움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해내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최대한의 고마움을 표현하려 노력하기는 하지만 늘 부족하기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제 연구를 도와주셨고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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