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꾸지 못했던 미래-박물관 2

박물관의 하루 _ 2

by Jino

부산일보 선배가 만든 인터넷 신문 지오리포트에 합류했다.

지오리포트는 신문들이 주로 다루는 국내 시사문제보다 지구촌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따뜻하면서도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을 주로 다루었고 그런 방향성이 나랑은 잘 맞았다.


취약한 인터넷 신문의 수익구조 탓에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사업에는 재능이 없었다.

손해와 이익을 따져보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아이템, 지구촌 문화상품으로 정했다.

시작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쇼핑몰에 매달리느라 정작 인터넷신문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 두 가지를 사명감을 가지고 해내기에 우리가 나이브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오랜 뒤다.


이 길이 맞는 것인가, 나는 얼마나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싶은 것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뭔가, 모호하고 막연한 중에도 일상은 계속됐다.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이란 표현이 그렇게 실감 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점점 어려움에 시달렸다.

40대에 새로운 길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그 길엔 장애가 가득했고 20대에도 안 하던 방황을 40대에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20대에 호된 방황을 못해서 40대에서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일상 중에도 내가 흥미를 갖게 된 일이 생겨났다.

원래 인형에 관심이 좀 있었던, 인터넷 신문을 만든 선배가 세계의 인형 몇 가지를 수입했는데 내게는 다른 문화상품보다 이 인형들이 예쁘고 재미있어 보여 좋았다.


우리를 박물관까지 오게 한 첫 인형은 마트료시카였다.

쇼핑몰에 상품설명을 올리기 위해 마트료시카에 대한 자료를 찾았는데 그 역사가 의외였다.

러시아 사람이 일본의 칠복신 인형이 이런 스타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 형식을 따라 했다는 것이다. 칠복신은 일곱 명의 복을 주는 신을 일컫는 말이고 칠복신 하나하나의 캐릭터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현재 대중문화에도 다 스며들어 있었다. 그저 상품에 대한 설명을 올리기만 하면 될 것이었으나 마트료시카의 역사가 재미있어서 나는 그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던져주는 고리를 부지런히 찾아 들어갔다.


마트료시카만이 아니었다. 인형들은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연을 말하기 위해 인형을 만든 것 같았다. 과테말라의 걱정인형은 과테말라 엄마들이 아이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천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로 만들었고 베트남의 수상 연극 인형은 베트남 농부들의 옛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인형은, 그렇게 나와 저 넓은 세상을 이어주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상품설명은 '상품을 팔기 위한' 설명이라기보다 '인형의 배경을 알려주는' 설명이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 인형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다. 나라별로 어떤 인형이 있는지 그 인형들이 입고 있는 옷은 어떤 종류이며 독특한 악기나 문화 풍습은 또 어떤 것인지. 가까운 프랑스 지인은 고맙게도 현지 수집가로부터 프랑스 지역별 귀한 인형들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지역마다 다른 옷과 머리 장식을 하고 있는 수십 개의 프랑스 인형들. 흔히 봐오던,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앤틱 인형의 범주는 아닌데 그 고풍스러움과 섬세함, 소박하면서도 어딘지 경건스럽기까지 한 표정, 적당하게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 고작 20cm가 안 되는 인형들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마트료시카가 인형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고 한다면 이 프랑스의 인형들은 슬그머니 '박물관'으로 우리 운명의 나침반을 돌려놓고 있었다.

1558579_574828052601376_1980016546_n.jpg 동교동에서 운영했던 세계인형전시관.

그즈음 서울 동교동에서 단독주택을 개조해 만든 아담하고 예뻤던 사무실 겸 매장에 '세계인형 전시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쇼핑몰의 다른 상품들은 다 밀어 두고 점점 인형에 집중했다. 인형을 '팔던' 우리가 점점 인형을 '팔기 싫어' 졌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악순환이었지만 일단 다람쥐 쳇바퀴 도는 느낌은 덜어지고 내가 시간을 보내도 아깝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뿌듯한 성취감이 있었다.


어느새 나는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형에 대한 설명을 소상히 해주었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내용들을 상대방이 재미있어하면 그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세계 여러 나라 인형들을 대륙별로 정리해 '인형과 함께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이란 강의를 기획해 전시관에서 진행했고 드물게 외부 강연을 나가기도 했다.


인형에 대한 자료가 쌓여갈 때쯤 '인형과 함께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이란 주제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기획안 공모전에 참여해 선정됐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서 모았던 자료로 책을 쓰게 되다니, 몇 년 만의 설레는 경험이었다. 원고는 20퍼센트 정도 완성된 상태로 기획안을 냈던 터라 결과가 발표됐던 7월부터 우리는 열심히 원고를 작성해야 했다.


소개할 인형이 정해져 있고 내용도 정해져 있으니 글을 쓰기만 하면 되는 터인데 내 글쓰기 진도가 영 나가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신문사에 다닐 때는 마감이 다가오면 하루에 원고지 20~30장도 썼었는데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는 속도는 더디고 그마저 모두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글쓰기를 너무 놓았구나, 많지도 않은 나의 기능 중 하나를 그나마 잃게 되는 건 아닌가 조바심도 났다. 하지만 카페를 전전하며 그렇게 글 스트레스를 받아도 책 원고를 쓰는 일은 좋았다. 마감일 지킨 것을 신기해하던(아마도 신문사와 출판사의 원고 마감 풍토 차이가 아닌가 싶었다.) 출판사 관계자는, 우리 원고가 넘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연락이 없더니 추석이 지난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아무래도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뉘앙스로 그 출판사와의 계약이 엎어졌음을 알리고 갔다.


막막했다. 애정을 쏟아 진행한 일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나 싶었다. 출판사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을 컬러로 써야 하는 인형 책을, 책 발행 비용을 다 대주는 것도 아닌 지원금으로 책을 만들어서 수지나 맞출 수 있을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출판사 탓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책이 12월까지는 출간되어야 했다. 시간은 없는데 대중적이지도, 그렇다고 대중적인 인기가 클 것 같지도 않은 책을 내 줄 출판사를 찾아야 했다. 짧은 시간에 책을 펴내려면 작은 출판사가 맞을 것 같아서 작은 출판사 위주로 전화를 하고 원고를 보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중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작은 출판사여야 한다고만 생각하지?"

그러게, 우리가 왜 그랬을까. 처음 출판사를 선택할 때부터 왠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출판사의 규모를 따지지 않고 다른 출판사들을 선택해 전화하고 원고를 보냈다.


바다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다음날 오전, 연락이 왔다. 답장의 속도도 빨라서 놀랐지만 지금도 그때 담당자의 시원하고 명쾌한 대답을 잊을 수 없다.

무심한 듯 분명한 목소리. "우리가 할게요."

알고 보니 바다출판사 사장님은 우리보다 인형을 더 좋아했다.

우리 글은 출판사의 애정을 한껏 받은 채 '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이란 제목의 책으로, 손도 비용도 많이 가는 특별한 판형으로 3천 부가 발행됐다.


이 일련의 과정은 세상일이 알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준 경험이다. 공모전에 선정돼 기뻤다가 출판이 엎어져서 낙담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덕에 원래 계획과는 비교되지 않게 훌륭한 책을 얻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갖고싶은 세계의 인형>.

미국 야구선수 요기 베라(Yogi Berra)의 표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단 한 문장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책은 분명한 전기가 됐다.

인형과 세계문화를 더 알고 싶었고 그렇게 쌓인 지식들을 또 책으로 써서 나누고 싶었다. 세계인형전시관은 어정쩡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좀 더 찾아올 순 없을까 궁리하다가 내가 직접 마트료시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홈페이지에 마트료시카 체험일을 공고했더니 2명이 왔다.


처음엔 3명이 앉아서 마트료시카를 만들었다. 그런데, 마트료시카를 그저 보는 것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어른 3명이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마트료시카를 만들었는데 색을 선택하고 더 예쁘게 꾸미기 위한 그 시간들이 기대보다 좋았다.

1526084_571090642975117_1592644929_n.jpg 가볍게 시작했다가 점점 빠져든 마트료시카 체험 시간.


이후 계속된 마트료시카 체험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꽤 긴 시간을 집중해야 하는데도 아이들은, 인형을 직접 만드는 게 좋아서 잘 해냈다. 커플이 오기도 했고 가족들이 찾아와 마트료시카를 만들기도 했다. 마트료시카를 만드는 동안 세계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도 좋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인형들을 계속 소장하고 더 모으고 싶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인형 이야기를 나누고 인형 만드는 게 좋고...


세계인형전시관을 넘어서는 더 큰 꿈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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