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형박물관 문 열다

박물관의 하루_ 3

by Jino


세계인형박물관 전경.jpg 세계인형박물관 전경

우리 생각은 점점 박물관으로 기울었다.


세계의 다양한 인형들을 수집해 간직하며 그 인형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람들과 폭넓게 나누고 싶었다. 인형에 대한 공부도 계속해 그 결과를 축적하고 싶었다.


박물관의 소프트웨어라 할 콘텐츠는 있으나 하드웨어는 없었던 우리는, 이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줄 장소로 파주 헤이리를 택했다. 헤이리 9번 게이트, 지금의 박물관 자리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선택했다.


헤이리는 1번에서 9번 게이트까지 있다. 1번 게이트로 많은 사람들이 오니 9번 게이트는 헤이리에서도 제일 외진 곳이었다. 하지만 야트막한 언덕 덕분에 앞이 탁 트인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고 맞은편 경기영어마을 건물은 예뻤다. 스튜디오로 쓰였던 공간 내부는 좁지도 넓지도 않아 적당했다. 내부가 2층 구조인데 세 군데의 공간으로 나뉘어 면적에 비해 아기자기하고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공간 내부, 우리가 박물관을 꾸미기에 좋았다.

%BB%E7%C1%F8_004.jpg 인테리어를 하기 전 박물관 모습.


공간을 정하고 나니 가장 큰 과제 하나가 우리 앞에 던져졌다.


'내부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


한국에서도 가장 핫한 곳으로 꼽히는 '홍대 앞'에서 보낸 8년 가까운 시간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교훈이 있었으니 그것은 '네 색깔대로 꾸며라'였다. 홍대 앞 카페나 식당에는 유독 그곳 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인테리어가 많았다. 그런 문화를 바로 옆에서 봐왔던 터라 우리가 애정을 쏟을 공간, 박물관 내부 인테리어를 누군가에게 전체로 맡기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하기로 했다. 동교동에 있던 세계인형전시관 역시 하나하나 우리가 판단해 꾸민 공간이었고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어지간히 자신도 있었다.

Na1427083153657.jpg 박물관의 주조색을 노랑과 오렌지로 정했다.


1월부터 계획을 세우고 2월쯤 공간을 확정했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개관을 한다면 5월이 좋다고 판단했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는 어린이들의 달일뿐더러 헤이리가 가장 예쁠 때이고 그래서 사람들도 많이 올 때니까 말이다. 인형 박물관을 여는 데는 더없이 좋을 때라고 판단했다.


다행히 스튜디오로 쓰던 곳이라 내부 구조를 크게 손 볼 필요는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쓰던 안내대는 높이도 적당하고 상판에 예쁜 타일 장식까지 있어서 그대로 쓰기로 했다. 일층에 불필요하게 큰 나무계단이 있었는데 그 역시 버리지 않고 쓸 용도를 찾기로 했다.


공간에 있어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은 '색'이다. 세계 여러 나라 인형들의 그 다양하고 화려한 색을 죽이지도 않고 너무 튀어 보이지도 않게 만들, 그렇다고 그저 배경색으로만 깔리지는 않고 조금은 화사하면서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색이라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간을 확정 짓는 '색'의 선정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만한 '전문가'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서양화가 양진아 님. 그림이 좋아서 몇 번 전시회에 가기도 했고 동교동에 있던 세계인형전시관을 마음에 들어하며 몇 번 방문한 인연이 있다.


양진아 화가는 박물관의 주조색으로 은은한 노랑과 밝은 오렌지를 택했다. 1 전시실을 그렇게 꾸미기로 했다. 은은한 노랑만 있으면 자칫 심심할 수 있으니 밝고 채도가 높은 오렌지로 포인트를 주기로 했다. 2 전시실 색은 무난한 라임 그린으로 했다. 전시 겸 체험 공간인 3 전시실은 조금의 모험을 감수하고 분홍과 보라색으로 정했다.

Na1427083153430.jpg 지금의 박물관 공간은 재미있는 구조가 맘에 들었다.


색이란 게 얼마나 까다로운지, 이렇게 색을 정하고 칠은 전문가들께 맡겼는데 우리가 가장 기대했던 오렌지색이 침침했다. 밝고 환한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탁한 오렌지가 우리 눈앞에 있었다.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어 페인트 가게에 가서 다시 색을 만들어 와서 칠해야 했다.

Na1427083152708.jpg 제3전시실이자 체험실.

내부 공간에 페인트칠만 해도 예뻤다. 양진아 화가의 선택은 완벽했다. 인형과도 잘 어울렸다.


지금도 관람객들이 이 아기자기한 공간의 색이 예쁘다고 할 때가 많다.

막막했던 이 공간을 환상적인 색으로 채워준 양진아 화가에게는 평생 고맙다고 해도 부족할 것 같다.


전시 형식도 고민이었다. 많은 박물관에서의 전시품은 유리장 안에 들어가 있지만 인형박물관에서는 당분간 전시물을 노출시키기로 했다. 유리 한 칸이 관람객과 인형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먼지 관리를 커다란 숙제로 남기지만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우리는 인형이 편안하게 보이기를 바랐다.


인형을 대륙별로 전시해야 할까? 테마별로 전시해야 할까? 가장 비중 있는 전시 인형으로는 무엇을 선택할까?

다른 인형박물관들은 전시물을 어떻게 진열했는지 궁금해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며 참고하기도 했고

더 참신하고 재미있는 전시 방법을 고민했다.


1 전시실, 관람객이 들어오는 첫 공간에는 20피스 마트료시카를 두기로 했다.

마트료시카와 우리의 특별한 인연 덕도 있고 20피스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인형의 전시는 대륙별로 배치하되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했다.


체코의 마리오네트는 특히 조금 특별하게 전시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작은 인형극장' 방식을 떠올리곤 아이디어가 좋다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우리끼리 좋아라 했다. 마음이 통한 건지 이곳이 지금은 인기 있는 포토존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전시관에서는 여유공간 없이 빼곡히 들어선 인형들을 그래도 박물관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 있게 진열할 수 있었다. 조명도 훨씬 보강됐다. 보다 훌륭한 공간에 놓으니 인형들도 더 가치 있게 보였다.

마치 지금까지 우리가 홀대(?)라도 한 것처럼 인형들은 제 가치를 제대로 드러냈다.


우리가 준비해야 했던 또 하나는 각 전시품에 대한 설명이었다.

인형을 글만으로 설명하면 지루해질 것 같아 설명 중간중간에 관련 자료 사진을 넣었다.

신문기자 출신들로 편집부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어서 만들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어느 공간을 우리 색깔로 꾸민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깨달으며 신기해했다. 우리가 걸어온 길들은 단계 단계 다른 것처럼 보여도 이렇게 이어지고 또 쓰이는구나 싶기도 했다.


시간은 부족하고 할 일은 태산 같았다. 결국 몇 날은 꼬박 밤을 새워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일이 많아도 좋았고 글씨를 크게 할지 작게 할지, 설명에 글을 많이 넣는 게 좋을지, 여백을 많이 주는 게 좋을지 등등 하나하나 선택하는 것도 즐거웠다.


인테리어가 어느 정도 끝나가면서 이제 간판을 고민했다.

흔한 폰트나 디자인은 싫고 박물관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캘리그라프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지인이 아는 캘리그라프 작가께 부탁을 했다. 고흐 작품 <아를의 침실>에 나오는 푸른색과 오렌지를 조합한 세계인형박물관 캘리그라프는 이렇게 아는 분께 신세를 진 끝에 우리 맘에 쏙 드는 간판이 생겼다.


인테리어를 마치고 건물에 '세계인형박물관' 간판이 걸리던 날을 잊을 수 없다.

헤이리 9번 게이트의 왼편 작은 언덕. 그 언덕의 한 건물에서 우리는 밤낮을 잊고 박물관을 준비했다. 5월이 어느새 바로 우리 앞에 있었다. 간판은 예뻤고 날씨는 좋았다. 5월의 헤이리는 더없이 싱그러웠다.


인형의 세계가 좋아서 빠져드는 마음과 인형뿐, 아쉽고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왜 이런 아쉽고 부족한 부분들은 준비 단계에서는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인지. 하지만 거짓말처럼 많은 분들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새 인생의 다른 문 앞에 와서 섰다.


준비를 마치고 인생의 새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파주 헤이리 세계인형박물관이라는 새 문의 손잡이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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