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꾸지 못했던 미래-박물관 1

박물관의 하루 _ 1

by Jino


museum.jpg 세계인형박물관 전시실. 매일 애정을 쏟는 나의 직장이지만 내가 박물관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세계인형박물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내가 일하는 곳이다.

박물관은 내가 어릴 때 꿈꾸었던 수많은 직업들 목록에 단 한 번도 끼어들지 못한 곳이다.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40대가 될 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박물관에서 일하게 될 줄은.

그런데 인생이란 그런 것이던가. 나는 어느새부터인가 박물관을 향해 오고 있었고 지금은 또

하루하루 열정과 애정을 쏟으며 이 박물관에 나를 맞추어 가고 있다.


만화가, 시인, 선생님.

어릴 적 내가 꿈꾸던 직업들이다.

아마도 만화가가 제일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만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다.

월간 소년중앙을 받아보던 터라 거기 실렸던 짤막짤막한 연재만화들에 감질났던 나는

급기야 만화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초등학생의 만화방 출입은, 당시로서는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었고 딱히 뭔지는 모르지만 몰래 해야 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만화책을 볼뿐인데 왜 이렇게 뭔가 잘못한 것처럼 해야 하지? 이건 부당해!'(그런 종류의 문화가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롤러스케이트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배짱 좋게 당당하지 못했던 나는, 나름 현실과 타협해서 엄마 몰래 목욕탕 다녀오는 길에 만화방에 가곤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만화책 보는 것이 너무 좋아 은밀하게 드나들었고 그렇게 만화방 출입은 지금까지도 간간히 이어지고 있다. 나의 공책 앞면은 언제나 만화를 흉내 낸 그림들로 빼곡히 채워졌고 가끔은 만화 형식으로 스토리를 전개시키기도 했다.


이제 내 아이들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이쯤이 되어서 지난날을 복기해보면,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 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 없이 공부만 했었다는 뒤늦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왜 그래야 했을까! 크게 재능이 없다고 해도 만화에 올인할 것을. 차라리 공부를 포기할 지경이었다면 만화가가 되진 않았을까. 그렇다고 또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아무튼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시간을 많이 쏟아야 했다. 고2 때는 마침 수학이 재미있어서 이과를 선택했고 그래서 대학 시험 때 내가 선택한 과는 제약학과였다.


그런데 이 제약학과 응시에서도 보기 좋게 미끄러진다. 철없던 나는 원서의 2 지망 칸을 비워두고 있었다. '내겐 합격뿐, 2 지망은 없다'란 호기를 부리면서.

그러나 평소 나의 철없음을 걱정해오시던 엄마가 만약을 대비해 2 지망을 '의류학과'로 적어놓았고 그렇게 나는 의류학과에 가게 되었다. (재수를 할 형편이 아니었던 이때 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쩌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낙담해 자포자기할 수도 있었겠고 몇 년 뒤에 돈을 벌어 대학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원하던 과에 가지 못해 낙심했던가? 아니다, 그때 오히려 깨달았다. 사실 나는 제약학과에 그다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성적에 맞춰 괜찮은 과를 가려고 했던 것뿐이고 제약학과 선택은 그저 전문직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의류학과를 다니면서 비로소 나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뭐였지? 내 성격은 어떤 편이지? 뭘 하고 있을 때 좋아했던가?

제법 심각하게 고민을 한 끝에 2학년쯤에야 내린 결론은 '기자'였다.

글 읽는 걸 좋아하고 사회에 관심 많고 돌아다니기도 좋아하니...'기자가 되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공부는 3학년 2학기쯤부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언론고시'라고 해서 언론사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 주변에 언론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없었고 이런저런 자료를 모으고 정보를 취합한 뒤, 나는 혼자 나름대로 차근히 준비했다.


운이 좋았다. 내가 생각한 교재들을 세 번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겨우 한 번 다 훑어갈 즈음 KBS 시험이 있었고 PD로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그리고 마감이 임박한 때, 부산일보 시험 소식을 듣고 (나의 시험 준비는 그만큼 허술했다) 응시해 합격했다. 대학교 4학년 8월에.


부산일보의 첫 몇 년은 좋았다. 대학 4학년 2학기를 직장에 바치는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1988년 언론노조 최초의 파업 경험이 있던 부산일보에는 대학 운동권 선배들처럼 많은 선배들이 사회의 정의에 관심이 많았고 노조의 목소리도 클 때여서 언론사다운 패기가 있었다.


첫 근무부서는 편집부. 선배들과 사이도 좋아서 함께 일하고 더러 함께 부당한 일에 맞서기도 하고 함께 술도 마시고 놀기도 많이 했다. 회사인지 대학 동아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고 신문 편집 작업도 매력적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때였다.


매일 아침 신문들 읽는 시간이 특히 좋았다. 편집부였기에 정독을 해가며 사안에 대해 사람들과 의견 나누고 내 지면은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다.


사회부에 있을 때 IMF가 왔다. 그때 내가 맡은 분야는 '노동'이었다.

지금도 사회부에서 야근을 하던 그날 저녁을 잊을 수 없다.

독자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그 독자는 기사를 제보하지도 부산일보의 어떤 기사에 대해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듯 토로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열심히 일만 했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왜 이렇게 어려워야 하죠?"

이 노동자 독자의 전화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다.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책상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틀로는 나올 수 없는 격정적 토로.


그 뒤로 한국 사회는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계속 나빠졌고 회사 밖에 비하면 안온한 편이던 부산일보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인원감축 바람이 불었다.

한 직장에서 오래 지냈던 동료들에게 인원감축의 현실은 비정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어쩌면 지금까지 사람들에겐 어느새 '나 먼저 살기'가 중요해졌다.

바른 보도를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함께 나섰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를 외면했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넷의 살아있는 표현과 현장성에 비해 종이신문이 고루하게 느껴졌다.

변화하는 사회가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찬란한 20대를 보낸 신문사, 직업은 좋지만 직장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기왕이면 40대 이전에 결론을 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회사를 관두기 1년 전, 서울지사에서 근무할 기회가 생겼다.

대학 때 서울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남았던 나는 미련 없이 서울로 왔다.

그리고 1년이 채 안돼 부산일보에는 또 감원 바람이 불었다.

감원 형식이 얼마나 합리적일 수 있을까마는 부당한 처사가 많았다.

내게 사표를 내라는 압력은 없었지만 억울한 대상자가 많았다.

마흔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회사 분위기도 그렇겠다,

겁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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