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하루_5
박물관을 준비하면서 전시물 설명문에 신경을 썼다.
관람객들이 그 설명문들을 꼼꼼히 읽어주길 바라기도 했고 대부분 읽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측은 대체로 현실과 어긋나는 법.
관람객들은 기대만큼 설명문을 읽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가 박물관에서처럼 분명한 곳도 드물 것이다. 설명문을 읽지 않으면 박물관에 온 의미도 그만큼 퇴색되지 않는가.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어, 저 설명문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데...'라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나는 전시관에서처럼 몇 가지 인형에 대해 설명을 했다. 관람객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마트료시카 안내에서 시작했다.
"이 인형 안에 이 인형, 이 인형 안에 이 인형이 들어가서... 열 개의 인형이 하나가 되잖아요?"
관람객의 눈빛이 모인다. "이 마트료시카 형식이 원래는 일본에서 시작됐어요."
3분에서 5분쯤 될까? 짤막하지만 설명이 끝나면 관람객들이 인형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더 재미있다는 듯 더 신기하다는 듯 전시된 인형들을 찬찬히 살핀다.
설명을 하는 입장에서 그 짧은 설명의 시간은 마법의 순간 같다. 내가 하는 몇 문장의 말이 주문처럼 인형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곤 다시 찬찬히 인형을 들여다본다. "아, 정말 그렇네. 이게 이렇게 이렇게 되는구나." 설명에 점점 빠져드는 관람객들도 있다. 궁금한 걸 물어보기도 하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설명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이 인형 저 인형 자꾸 설명하게 된다.
설명을 하는 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라거나 '혼자 조용히 감상하고 싶은 건 아닐까?' 같은 생각들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은 관람객들을 만나면서 나름대로 알 수 있게 됐다. 설명을 원하는 관람객과 그렇지 않은 관람객을 구분하는 법을.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은 설명에 귀를 기울여 준다.
"설명을 듣고 보니까 더 재밌네요." 관람객들에게서 듣는 가장 황공한 소감이다. 꽤 많은 관람객이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이럴 때면 처음 만나는 관람객이라고 해도 나와 어떤 '관계'가 만들어진다. 나는 내가 아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관람객은 귀를 기울이며 내가 이야기하는 세계를 조금씩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서로의 눈빛이 오고 가고 말이 오고 간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까지 할 때면 '이 간단한 설명이 뭐라고 이렇게 정중한 인사를 해주시나'싶어 외려 내가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가 아는 세계와 관람객의 관심에 작은 교집합이라도 있을 때면 이야기의 주제가 그 교집합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인형에 관한 것도 좋고, 인형과 관련된 정서나 경험에 관한 것도 좋다. 우리 사이의 교집합이 많다 싶을 때면 이야기 시간도 길어진다. 처음 만나서도 신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다.
박물관을 한번 왔다가는 인연이라고 해도 그렇게 깊어진다. 내가 박물관에 오는 관람객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지만 인형을 매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은 그대로 쌓여 소중해진다. '소통'이란 건 대단한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박물관에서 깨닫게 됐다.
이 소통은 아기와도 가능하다. 박물관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왔던 돌배기 연우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내가 설명을 할 때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집중해서 설명을 들었다. 내 설명이 끝난 뒤에는 엄마가 인형 하나하나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돌배기 아이가 1시간을 그렇게 한 번 울지도 않은 채 인형을 관람했다. 연우 엄마께 들으니 태어나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고 한다. 연우는 인형도 좋아해서 전시된 인형들을 조심스럽게 만지기도 하고 호두까기 인형에는 살짝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나는 그런 연우가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조심스럽게 안아보기도 하고 내가 직접 인형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인형을 지독히 좋아했던 연우는 박물관을 떠나기 싫다고 울기까지 했다.
연우가 다녀간 뒤에도 나는 가끔 다른 연우들을 만난다. 내가 인형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가만히 쳐다보며 열심히 이야기를 듣는 아기들을. 저 아기들에게 내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까. 내가 다시 아기를 키운다면 계속 말을 걸어줘야지.
누군가가 '말을 하고' 또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준다', 비록 그 내용이 조금 딱딱하거나 건조한 내용이라고 해도 이 주고받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따뜻한 문화적 행동이 아닌가.
더 말하고 더 귀기울이자, 박물관의 하루하루가 어느새 나를 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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