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의 하루 _ 8
박물관에는 학예사가 있어야 한다.
전시품을 수집, 관리하고 전시회를 기획하며 전시물에 대한 연구를 축적해 나가는 역할을 한다.
인형을 좋아한 것도 인형을 수집한 것도 우리였으니 학예사 업무를 다른 누구에게 맡길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학예사가 되기로 했다.
근데 이 학예사가 되기 위한 요건이 꽤 까다롭다. 준학예사 자격증 시험은 누구나 칠 수 있지만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은 경력 인정기관에서 1년을 근무해야 준학예사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3년제 대학-2년, 2년제 대학-3년,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경우 -5년). 준학예사에서 3급 정학예사가 되려면 4년간 학예사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석사 학위 취득자는 2년, 박사 학위 취득자는 1년). 3급 정학예사가 다시 2급 정학예사가 되기 위해서는 5년을 경력 인정기관에서 근무해야 하고 2급 정학예사가 1급 정학예사가 되려면 7년 이상의 재직 경력이 있어야 한다. 햇수만 채운다고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각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학예사로 재직하면서 근무는 충실히 했는지, 전시 기획은 잘 했는지 그에 걸맞은 실적도 따라주어야 한다.
학사 학위 취득자인 내가 준학예사 자격증 시험을 치고 1급 정학예사가 되려면, 단계마다 모두 제때 통과하더라도 16년이 걸리는 기나긴 길이다. 물론 1급 정학예사가 될 때쯤이면 그만큼 이 업무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기대해도 되겠다.
시험이 고시만큼 어렵진 않지만 만만한 것도 아니다. 박물관학과 외국어는 필수과목으로 객관식으로 치르고 고고학, 미술사학, 예술학, 민속학, 서지학, 한국사, 인류학, 자연사, 과학사, 문화사, 보존과학, 전시기획론, 문학사 중 2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심지어 선택과목 2과목은 주관식이다.
외국어는 영어를 선택하고 선택과목으로는 미술사학과 인류학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전시기획론을 많이 선택하는 것 같았지만 (별 실력도 없으면서) 전시기획론은, 공부하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기출문제 몇 개를 보니 지나치게 실무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수험생들은 강의를 듣거나 스터디를 한다지만 그건 원래 내 스타일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박물관학은 교재 2권, 영어는 텝스 기출문제 1권, 미술사학은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와 클릭 서양미술사, 한국미술사 책을 정독하기로 하고 인류학은 그냥 관련 책을 10권 정도 읽으면 감이 오겠지 싶었다.
하지만 시험공부 계획이 언제나 그렇듯 장애가 많았다. 우선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집에서는 집안일하고 나면 뻗고 박물관은 아직 이래저래 손이 많이 단계인 데다 국고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하는 바람에 일이 많았다.
일이 많아 시험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싶었으나 그다음 기회를 노렸다간 1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준학예사 시험은 1년에 1번 치르는 야박한 시험이다. 공부를 안 하자니 걱정은 되고 빠듯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책을 한 줄이라도 읽으려 했다.
그런데... 이 준학예사 시험을 준비해 본 이들은 알겠지만 어찌 된 건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진다.
박물관학은 그나마 가장 쉬워 보여서 시험이 가까워 올 때 할 요량으로 미뤄놓고 영어 문제집 먼저 풀었다. 세상에나, 텝스 단어가 그렇게나 어려운 지 몰랐다. 단어는 그런대로 안다고 자부했는데 텝스에는 내가 모르는 단어만 골라놓은 것 같았다. 준학예사 시험이 텝스 스타일로 나온다고 해서 텝스 기출문제를 푼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텝스보다는 쉬웠다.
미술사학은, 공부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재미가 있었다. 특히 곰브리치의 책은 술술 읽혀서 한 번 정독하고 두 번은 가볍게 읽었다. 시대별 미술의 특징이 잘 정리돼 있어서 좋았고 곰브리치의 문장들이 매력적이었다. 눈도 머리도 행복해지는 독서라고나 할까. 하지만 책이 재미있다는 사실과 시험 준비가 잘 되는 것은 별개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재미있긴 했지만 현대미술에는 좀 약했다. 클릭 서양미술사로 그 점을 보완했다. 그래도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만만치 않았다. 주관식이라 내가 잘 외우지 못한 내용이 나오면 시험을 망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인류학의 경우는 더했다. 미술사는 그나마 공부할 대상이 뻔하지만 인류학의 그 많은 사례들은 뭐가 이론과 함께 문제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학교 시절 공부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교과서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교과서 범위를 아주 크게 벗어나진 않는데 미술사와 인류학은 그 넓은 범위중 어디에서 어디까지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였다. 그마저도 시간이 없어 인류학은 공부하려고 준비한 10권의 책 중에서 세 권을 겨우 읽었을 뿐이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와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머리가 아팠다. 포기할까? 이 시험은, 내가 잘 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도 못하게 했다. 그래도 준비했으니 일단 치고나 보자 싶은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2015년 11월 28일 토요일. 모처럼 수험생이 되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갔다. 어른이 다 되어 시험을 치는 기분은 신선했다. 오전 시험은 객관식. 객관식에 익숙한 인생이라 그럴까. 아주 어렵진 않았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치른 주관식 시험. 미술사는 그나마 내가 조금이라도 써넣을 수 있는 것이 나왔지만 인류학은 절반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시험 문제와 정확히 연관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사례들을 적어 넣었다. 40점 이하면 과락, 4과목 평균 60점 이상이어야 하는데 미술사도 60점이 안될 것 같았고 인류학은 과락이 염려될 지경이었다.
합격 발표가 나던 12월 말. 나는 정말이지 이 시험의 합격 발표를 내 생애 치렀던 다른 어떤 시험의 결과보다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인형의 세계에 빠져 박물관까지 열었는데 무슨 사업이든 진행하려면 학예사 자격증은 있어야 했다. 두근두근... 발표 시간인 9시를 전후해 합격자 발표가 나는 사이트를 몇 번이고 들어갔다.
합격! 성적은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합! 격!이었다. 나는 대입에 합격한 것보다 옛날 부산일보에 합격한 것보다 기뻤다. 이제 일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박물관을 향해 달려온 한해의 마무리로는 훈훈했다.
뜬금없이 옛날에 본 영화 제목이 생각났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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