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만나는 즐거움

박물관의 하루 _ 9

by Jino

"인형들하고 눈싸움하기 싫어!"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놓인 20피스의 마트료시카를 보던 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자리를 떴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아이가 있던 자리로 가서 아이가 보고 있던 인형을 보니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정면을 바라보는 인형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자기도 똑같이 마주 보자니 그게 눈싸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아이의 그 표현이 너무 신기해서 어디에라도 써두고 싶었다.


아이들과 있을 때면 이런 신비한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어른과는 다른 감수성, 어른과는 다른 느낌.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친구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인형까지도.

엽서 하나도 가득 채우는 아이의 감성.

한 자매는 박물관을 떠나면서 인형들에게 손 흔들어 인사를 하고 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박물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아이들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이 있는 소파로 간다. 거기서 한참 인형들과 대화를 나눈다. 원래 풍요나 다산을 기원하는 데 쓰인 인형은 고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언린이들의 장난감이 된다. 아마도 어린이들의 이런 특별한 감수성이 인형과 가까워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박물관에 관람온 아이들은 자신들의 공간으로 떠날 때가 되면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을 보며 우리도 안타까워서 아이들을 태운 차량이 박물관을 벗어날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떠나는 차량 안에서 아이들은 또 우리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준다. 햇볕 좋은 날, 헤이리 언덕에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손을 흔들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기운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시간이 좀 걸리는 인형 만들기 체험을 하는 아이들과는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다. 이때면 또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아이들 몇 명이 함께 체험을 할 때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대화 속으로 초대된다.

아이들이 자꾸 벌 세우는 피노키오


"추장보다 높은 사람은?""고추장!"
"부산 앞바다 반대말은?""부산 엄마다!"
"참기름과 간장이 재판을 했는데 간장이 감옥에 갔어. 왜 그랬게?""참기름이 고소해서!"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개그를 들으며 함께 깔깔거리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아이의 속마음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이 다녀가면 인형들이 살짝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인형은 이탈리아의 피노키오. 어떤 아이는 팔을 다 올려서 마치 벌서는 것 같은 모양을 연출했다. 왠지 너무 벌서는 것 같아 내가 그 두 팔을 내려주었는데 다른 누군가가 또 피노키오 벌을 세웠다. 아마도 피노키오의 코가 길어서 아이들이 벌 준 것 같다.


나란히 서있던 이탈리아 여자 인형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도록 만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바뀐 모습이 마치 인형들끼리의 대화를 시도한 것 같아 재미있었다. 그런가 하면 페루 야마 인형의 모자가 벗겨져서는 양 인형에게 씌워져 있기도 하다.

또 어떤 아이는 마트료시카들을 나란히 줄 세워 놓고 가기도 했다. 아이들이 인형에게 이렇게 살짝 변화를 주고 갈 때면 나는 마치 관람객이 보낸 재미난 쪽지를 펼쳐보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의 특별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이들과 함께 오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설명 열심히 들어라." 거나 "여기 설명문 잘 읽어."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박물관에 들어오는 순간 오감으로, 직관적으로 인형을 감상하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얘는 눈이 슬퍼 보여.""얘는 화났어." 아이들의 이런 표현을 들으면 나도 인형을 다시 보게 된다.

0805.jpg 나란히 나란히 줄 선 마트료시카들


언젠가는 인천의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들이 '세계의 인형'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를 위해 박물관에 온 적이 있다. 우리가 쓴 책 <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도 다 읽었다더니 옥수수 껍질 인형이며 마트료시카를 보자마자 이름을 척척 맞췄다. 몇 달 전부터 조사해 온 세계의 인형. 세계의 인형이 있다고 해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소녀들. 인형 이야기를 들려주던 나도 잠시 그 나이로 돌아간 듯 유쾌해져서 함께 어울렸다.


이렇게 아이들을 만나 어울릴 때면 박물관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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