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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 Jul 19. 2018

4.그리스&로마-인형,장난감이 되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인형은 신전에 바치는 의식용이나 다산의 상징으로 주로 쓰였다.  이 시대 인형들이 주로 발견된 곳은 여신들의 신전이다. 특히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 결혼의 여신 헤라(Hera) 여신, 그리고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Aphrodite)  신전에서 발견된다.     


 그리스의 여자 아이들은 성인이나 결혼 적령기가 되면 자신들의 인형을 신전에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여자 아이들이 신전에 인형을 바침으로써 결혼기간 동안 아이를 잘 낳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자 아이가 결혼을 미처 하기도 전에 죽게 되면 인형을 함께 묻었다. 그리스 시대 인형은 형태나 기능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인형은 천이나 나무, 밀랍, 상아, 그리고 테라코타로 만들었는데 특히 테라코타로 만든 인형이 발달했다.                      

다이달라

 그리스 시대에 인형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B.C. 6세기~B.C. 4세기에 테라코타로 인형의 부분을 만들어 끈으로 연결시킨 인형 다이달라(dai dala)를 탄생시켰다. 다이달라는 올빼미 얼굴(올빼미는 지혜와 사냥의 여신 아테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란 표현은 아테나 여신의 로마식 이름이 미네르바 인데서 나온 표현이다.)을 한 아테나(Athen) 여신의 모습이다. 끈을 연결시켜 움직일 수 있게 만듦으로써 ‘실물 같은(lifelike)’ 인형을 등장시켰다. 다이달라는 네브로스파스톤(nevrospaston)에 이르러 더 정교해진다. 다이달라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 다이달로스(Daedalus)의 이름에서 따왔다.      


 다이달로스는 ‘명장(名匠)’의 뜻이기도 하다. 크레타 왕국 미노스 왕의 일을 하게 된 다이달로스는 포세이돈의 저주로 황소를 사랑하게 된 미노스 왕의 왕비 파시파에의 요청으로 나무로 된 암소를 만들어 파시파에가 그 속에서 황소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해 주고 그 결과로 낳은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가두는 미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을 탈출하게 되고 그 벌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섬에 갇히게 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다이달로스는 아들과 함께 탈출하기 위해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연결시키는 기막힌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러나 아들 이카루스는 뜨거운 태양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빠의 말을 어긴 채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스 인형 다이달라의 이름이 다이달로스에서 나온 것은 이 인형이 그 당시로서도 놀라웠기 때문으로 ‘다이달로스를 연상시킬 만한 훌륭한 기술’이라는 칭찬이 담긴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마스코트였던 ‘페보스(Phevos:아폴로)와 아테나(Athena)’도 이 다이달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스에서 인형은 한층 더 발전해서 마리오네트(marionette) 인형의 전신이라고 할 ‘네브로스파스톤(nevrospaston)'을 만들기에 이른다. 네브로스파스톤은 팔과 다리도 따로 끈으로 연결한 보다 정교한 형태이다. 다이달라나 네브로스파스톤은 모두 여성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B.C. 6세기~B.C. 4세기까지는 여신을 위한 축제에 이용되거나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죽은 여성의 무덤에 넣어주었다.     


 그리스에서는 점차 인형을 활용한 연극이 발달하게 되었고 네브로스파스톤은 인형극에 널리 사용되었다. 인형의 형태도 앉아 있는 인형, 남자 인형으로 발전하고 이렇게 확산된 인형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네브로스파스톤은 옷을 입히거나 벗길 수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인형의 옷과 관련한 유적은 발견된 것이 없지만 문헌을 통해 인형의 옷에 관한 언급이 나타난다.                    

                                 

 고대 그리스의 놀이 기구 중에는 현대 사회에까지 이어지는 것들이 많다. 요요, 주사위, 바퀴로 움직이는 작은 말 모형, 각종 공놀이 등이 이때 이미 등장하는 데 그리스에서는 어린 시절의 이런 놀이들을 중요하게 여긴 문화의 영향이 크다.  인형은 특히 인기가 많았다. 그리스에서부터 인형은 아이들의 인기 있는 장난감이 되었다.   

   

네브로스파스톤

 고대 로마에서 인형은 아들에게 종교를 가르치거나 아이들끼리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 교육적인 용도로 널리 쓰였고 때로는 부적의 용도로도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에서 인형은 어린이들과 훨씬 가까워졌고 대량으로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장난감으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에서는 '시길라(sigilla)'라고 하는 점토 인형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로마 시대에 인형이 대중화된 데는 로마의 최대 축제였던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의 영향이 컸다. 사투르날리아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농경신 사투르누스(Saturn:‘씨를 뿌리는 자’라는 뜻. 사투르누스(Saturn)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크로노스(Kronos)로 나온다. 크로노스는 제우스에게 쫓겨나게 되어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쫓겨간 이탈리아에 농업기술을 보급했다. 행성 토성(Satrun)과 토요일(Saturday)이 사투르누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를 위해 펼쳐진 축제로 씨를 뿌린 뒤 씨가 잘 자라 풍작이 되도록 기원하는 축제였다.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떠들썩하게 열렸던 축제는 12월 23일까지 연장되기에 이른다.      


 12월 23일은 고대 로마제국이 믿었던 태양신 미트라스(Mithras)의 탄생일이다. ‘디에스 나탈니스 솔리스 인비크티(Dies Natalis Solis Invicti: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이라고 불리는 이때는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아지는 때로 이때를 기점으로 해가 서서히 길어지기도 해서 ‘빛의 재생과 새해의 도래’를 의미하기도 했다.                            

사투르날리아의 흥겨운 분위기를 묘사한 조각상

 이 떠들썩했던 축제가 고대 로마제국이 기독교로 전환한 A.D. 3~4세기까지 이어진 점 때문에 지금의 전 지구적 크리스마스와 새해의 축제 분위기가 사투르날리아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미트라스교의 미트라스와 기독교의 예수 탄생일이 거의 비슷한 점은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사투르날리아 시기 로마의 풍경을 보자면 연말연시를 보내는 고대 로마제국의 풍경이 지금의 연말연시를 보내는 풍경과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는 보다 파격적이고 관대하다.      


 사투르날리아 기간이면 로마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고 쉬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축제의 첫날 사원에서 의례를 지내고 다음날에는 집에서 새끼 돼지를 바치면서 제사를 지냈다. 이 기간이면 집집마다 초를 켜두었다. 초는 동지라는 시기에 맞춰 빛의 재생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식과 진실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초록색의 리스 장식은 이때부터 등장한다.  리스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중해 연안에서 왕과 황제들은 월계수 잎의 왕관을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투르날리아 기간에 만들어진 리스는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것이었다.                      

 빨강과 보라, 금빛으로 된 장식물도 즐겨 사용했는데 토가의 빨간 선 무늬는 로마 시민의 상징이었고 보라색은 부를 나타내는 색이었다. 황금색은 사투르날리아 기간에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사투르날리아가 태양의 축제였고 황금색은 이 태양을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이었다. 빨강과 보라와 황금색은 다산과 풍요와 풍작을 기원하는 색으로 널리 쓰였다. 이 세 가지 색으로 별과 동물 장식을 만들어 집안 곳곳을 장식했다.      

로마 시대의 인형들

 사투르날리아의 마지막 날, 즉 12월 19일은 ‘시길라리아(Sigillalia)’라고 해서 로마의 시민들끼리 선물을 주고받았다. 이때 주고받는 선물은 거창한 것보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선호했다. 이 시길라리아 기간에 로마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시길라(Sigilla)’, 혹은 '시길라리아'라고 하는 점토 인형을 사서 선물로 주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아이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인형에 친숙해졌고 축제가 인형으로 인해 더 풍성해졌다. 사투르날리아 때면  노예에게도 축복이 내려졌다. 주인과 노예의 역할 바꾸기라는 의식도 있어서 이날이면 다른 때와 달리 주인이 노예에게 음식을 차려주기도 하고 노예는 주인의 험담을 맘껏 하는 시간도 있었다. 평소 노예에게는 엄격히 금지됐던 도박과 주사위 놀이도 허용됐다.      


 인형은 노예에게도 선물로 주어졌다. 사투르날리아 때면 노예들은 다섯 개의 시길라와 동물 뼈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선물 받았다. 점토 인형 이외에 밀랍 인형도 등장해 선물로 교환됐다.     


 축제 기간에 사람들은 모자의 끝 부분이 뾰족한 펠트 모자 ‘필레우스(pilleus, 혹은 프리지안 모자(phrygian cap). 유럽 문화에서 이 필레우스는 자주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자유의 상징으로 쓰이면서 ‘자유의 모자(liberty cap)'으로 불렸다.)’를 쓰고 축제를 즐긴다. 필레우스는 자유인의 상징이어서 원래 노예는 쓸 수 없었으나 사투르날리아 기간에는 주인들이 노예에게도 필레우스를 주어서 쓰게 했다.  인형이나 초가 사투르날리아 때면 선물용으로 인기가 있었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감사의 카드를 처음 쓴 것도 로마 시대였다.                     


 사투르날리아는 그때까지는 없던 풍성하고 자비롭고 감사가 넘치는 - 사투르날리아의 초창기에는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도 있었다고 하지만 곧 없어졌다 - 새로운 축제의 장을 펼쳤다. 노예까지 적극적으로 동참시킨 그 포용성은 한편 놀랍다.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였으며, 태양의 신을 숭배하고 모든 이들에게 축복과 은혜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던 이 축제에 인형은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인형은 작은 정성과 비용으로 선물을 받는 상대방을 만족시키기에 좋았고 이때부터 인형은 점차 신에게 바치던 경건하고 숭고한 의식의 대상에서 사람의 손, 아이들의 손에 들어가 장난감이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헝겊 인형도 발전했다. 1~5세기경 로마의 통치 아래 놓였던 이집트에서 19cm 정도의 인형이 발견되는데 이 인형은 린넨으로 만들어졌다. 인체의 비율을 거의 그대로 반영해 머리와 몸을 구분했다.           

로마 시대의 헝겊 인형

 인형의 속은 파피루스와 다른 헝겊 조각들로 채웠다.      


 팔은 린넨을 길게 말아 등에 가로로 붙여서 표현했고 얼굴과 몸에는 원래 색깔이 있던 울을 덧댄 흔적이 남아있다. 인형의 모양으로만 봐서는 성별이 불확실하지만 이 인형의 왼편 머리에 파란 유리구슬이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서 머리 장식을 한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영향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이 인형은 2천 년 가까운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 로마 시대 헝겊 인형은 지금도 많이 만들어지는 인형의 형식이다. 단순하게 천으로 머리와 팔과 다리를 만든, 사람의 모양을 한 것이다. 헝겊은 부드러움을 안겨줘서 인형을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다.   2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인류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왔음에도 고대에 만들어진 인형과 현대에 만드는 인형이 이렇게 유사한 이유는 뭘까.      

 로마에서 인형의 발전은 놀랍다. 1~2세기에 이르러서는 현대에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정교한 형태를 이미 완성시켰다. 상아로 만든 관절 인형은 인체의 비율이며 관절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눈에 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표현했는가 하면 얼굴 표정과 머리카락의 모양까지 섬세하게 만들었다.

로마에서 발견된 2세기 인형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인형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그리스가 인형 그 자체의 외형적 요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와 인형을 좀 더 사람에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로마는 이 인형을 인류의 문화 속으로 아주 가까이 끌어와 즐기면서 현대 인형 문화의 토대를 완성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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