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만물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며 자연을 섬기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는 인형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발전해 왔다.
대표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형은 카치나(kachina, 혹은 katsina). 긴 사람의 몸체에 독특한 형상의 머리를 한 작은 목각인형이다. 카치나는 푸에블로(Pueblo:'마을'이란 뜻의 스페인어.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호피(Hopi) 족과 주니(Zuni) 족을 마을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의 대표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피 족과 주니 족 사이에 만들어진다. 주니 족의 카치나 문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반면 호피 족의 카치나 문화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카치나는 아이들에게 주어지지만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는 않는 특이한 인형이다 카치나는 원래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로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신성한 매개이기도 하다. 카치나 인형은 이런 카치나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카치나 인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호피 족은 카치나가 자신들과 함께 지하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온 영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카치나는 호피 족과 함께 정착해서는 농사를 짓기에 좋도록 비를 불렀고 호피족을 도왔다. 하지만 호피족들이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카치나들이 죽게 됐고 그렇게 카치나의 연혼들은 그 영혼이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가게 됐다.
카치나들이 희생됐지만 그들의 물품은 남았다. 호피 족은 남은 카치나들의 마스크와 옷을 입으며 카치나를 흉내 냈고 다시 비를 불러 풍년을 맞기 위해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먼 옛날 카치나들이 호피족을 위해 춤을 추면서 비와 많은 축복을 가져왔는데 호피족이 점점 존경과 숭배를 게을리하게 됐다. 그래서 카치나는 결국 지하세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카치나가 돌아가기 전에 몇몇 젊은이에게 그들의 의식을 가르쳐 주고 마스크와 옷 만드는 법을 알려주어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호피 족은 매년 2월 포와무야(Powamuya: 콩 춤)라는 의식을 가진다. 콩을 심기 전에 열리는 이 의식은 호피
족에게는 한 해의 풍작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며 카치나 역시 이때 호피 족을
위해 마을에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카치나 분장을 하고 카치나의 역할을 한다. 포와무야 때면 바구니에 50~100개의 콩 씨앗을 심은 뒤 부근에 불을 피워 콩이 빨리 자라도록 한다. 포와무야의 열 여섯째 날에 카치나들이 춤을 추고 아이들에게 인형을 준 뒤 발아한 콩을 건네준다.
호피 족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매년 2개의 인형을 받는데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인형은 장난감이 아니라 집에 모셔둔 채 카치나를 의식하며 반듯하게 성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 카치나 인형은 미루나무 뿌리로 만들어지는데 미루나무는 뿌리에 수분이 많아서 카치나들이 호피 족에게 풍부한 비를 내려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카치나는 이렇게 2월이면 호피 족 마을에 와 의식을 치르고 8월에 다시 돌아간다. 아이들도 6~10세의 나이에 이 포야무야 의식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카치나도 각각의 역할이 있다. 현재 알려진 카치나만 해도 400여 종에 이른다.
예를 들어 우파모(Wupamo) 카치나는 '긴 입 카치나'로 불릴 만큼 기다란 입이 특징이다. 많은 카치나들을 통솔하는 우파모는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거리를 깨끗이 청소한다. 에오토토(Ewtoto) 카치나는 모든 카치나들의 수장으로 영적 아버지에 속한다. 에오토토 카치나는 모든 계절을 다스리고 구름을 데려와 비가 내리도록 해서 호피 족들을 돕는다. 시키야쿼클러(Sikyaqöqlö)는 콩 춤을 추는 동안 아이들에게 간단한 악기와 장난감 등의 선물을 만들어 나누어 준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카치나이기도 하다.
카치나의 역할 중 눈에 띄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오그르(Ogre)카치나는 푸줏간에서 쓸 법한 커다란 칼과 톱, 화살 등을 들고 다니거나 등에 바구니를 지기도 하는데 무례하거나 버릇없는 아이들에게 겁을 줘서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다.
마나스(Manas) 카치나는 여자 카치나로 머리 윗부분 양쪽으로 동그랗게 머리카락을 말아 올린 모습이다. 그래서 호피 족의 어린 여자아이들은 결혼 적령기가 되면 마나스 카치나처럼 머리를 양쪽으로 말아 올린다. 하지만 마나스 카치나 중에서도 전사는 한쪽만 말아 올리고 다른 한쪽은 느슨하게 풀어헤쳐진 모습인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먼 옛날 이 전사가 머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데 한쪽 머리만 만 상태에서 갑자기 적이 쳐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쪽 머리만 말아 올린 상태로 아빠의 무기를 빼들고 나가 마을을 지켜낸 것이다.
호피 족의 수많은 카치나들은 이렇게 마치 신화처럼 고유의 역할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신화와 다른 점이라면 그 카치나들은 먼 옛날이야기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매년 호피 족을 찾아와 자신들을 상기시키고 호피 족에게 유익한 비를 내려 호피족이 농사를 잘 지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많은 카치나들의 보살핌 속에서 그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호피 족은 이를 감사해하며 생활 속에서 언제나 카치나를 떠올린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도 카치나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며 공동체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듯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한 곳에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는 호피 족과 달리 이동하며 사냥을 하며 이동 생활을 하는 수(Sioux) 족은 사슴 가죽(buck skin)으로 정교한 인형을 만든다. 수 족은 원래 구슬공예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구슬이 빼곡히 장식된 화려한다. 수 족이 만드는 인형도 그 정교함이 현대의 많은 인형에 뒤지지 않을 정도다.
수 족의 아이들은 성별에 따라 확연히 다른 역할을 한다. 남자아이들은 훌륭한 전사나 사냥꾼이 되는데 필요한 기술을 익힌다. 삼촌이나 할머니가 첫 번째 활과 화살을 건네며 남자아이들을 격려한다. 반면 여자 아이들은 엄마와 할머니로부터 옷 만드는 법을 배운다. 어른들은 여자 아이들에게 인형을 건네며 어릴 때부터 아이를 잘 돌보는 법을 익히게 만든다. 인형을 진짜 아이처럼 보살피는 수 족의 여자 아이들은 인형을 위한 작은 말과 작은 요람판 등을 만들어 주며 인형을 보살핀다. 인형은 수 족 여자 아이들에게는 친구이자 아기이며 장차 여자 아이들이 살아나갈 삶을 실제처럼 연습해 보게 하는 매개체여서 여자 아이들은 이 인형을 통해 아이를 돌보는 법, 바느질하는 법 등을 배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지금도 얼굴이 없는 옥수수 껍질 인형을 볼 수 있다. 주식이 옥수수였던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의 옥수수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마야 신화에 따르면 사람은 옥수수로 만들어졌고 옥수수는 콩, 호박과 함께 농업의 세 자매라고 불렸다. 옥수수를 처음 심을 때면 경건한 의식을 치렀고 비가 충분히 내려와 옥수수 농사가 잘될 수 있기를 비는 건 아메리카 원주민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옥수수 껍질 인형은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로쿼이(Iroquios) 주민들에게는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농업의 세 자매 중 하나가 된 것을 기뻐한 옥수수의 영혼이 신에게 인간을 위해 일을 하겠다고 한다. 신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인형을 만들라고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옥수수 껍질 인형에게 예쁜 얼굴을 준다. 헌신적으로 이로쿼이의 아이들을 돌보던 옥수수 껍질 인형은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계속 예쁘다는 말을 듣게 되자 점점 허영심을 갖게 된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내팽개치고 개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는 일이 많아졌다. 신이 경고까지 했건만 다시 개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어느 날, 가면올빼미가 나타나 옥수수 껍질 인형의 얼굴을 낚아채 가버렸다. 신이 외모를 뽐내는 옥수수 껍질 인형에 내린 벌이다.
옥수수 껍질 인형의 전설은 교만과 허영심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특히 서로 다른 6개의 부족이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던 이로쿼이 족은 사람들의 섣부른 교만과 그로 인한 갈등을 경계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옥수수 껍질 인형을 통해 자신의 외모를 뽐내지 말 것과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도록 가르친 것이다.
사람 손가락 한마디의 키도 안 되는 과테말라의 걱정인형은 버려진 천 조각 하나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돋보인다. 옷이나 직물을 만들고 버리게 되는 작은 천 조각, 실 한 가닥을 작고 가는 나뭇가지에 칭칭 감아 만든 걱정인형. 과테말라 사라들은 여기에 눈을 그려 넣고 머리카락을 장식해 '걱정인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밤에 별별 걱정에 잠 못 드는 아이들에게 "걱정은 이 인형한테 말하고 베개 밑에 넣어두렴. 그러면 이 인형이 네 걱정을 모두 가지고 사라진단다."라고 속삭여 준 것이다. 엄마나 아빠가 해줬을 다정한 말 한마디, 그리고 걱정인형은 그렇게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아이는 걱정인형에게 말하며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주 세미뇰(Seminole)과 미코수키(Miccosukee)족은 19세기까지 지역에서 나는 야자나무 팔메토(palmetto)를 깎아서 그 위에 옷을 입힌 단순한 모양의 인형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20세기 초 이 인형을 관광객에게 판매하면서 인형은 큰 인기를 얻으며 많이 만들어졌다. 이 부족들의 화려한 옷은 인형을 더 특색 있게 만들어 주었다.
세미뇰과 미코수키 족은 팔메토 재료를 찾는데 많은 공을 들이는데 이 팔메토가 자신들의 피부색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형을 만들 때 지켜야 할 금기가 있는데 공동체 내 누군가를 닮은 인형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미뇰과 미코수키는 인형이 누군가를 닮으면 그 인형을 닮은 사람과 인형을 만든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연을 경외하며 공존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주변의 재료로 인형을 즐겨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인형을 어떤 형식으로든 아이들의 교육에 활용해 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인형을 통해 공동체의 규범을 자연스럽게 익혀온 점이 이채롭다. 인형은 아이들의 친구이자 친척 어른이었고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