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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본 1-액 쫓고 행운 빌어주는 벗

by Jino

아시아의 외딴 섬나라, 일본에서 인형은 특별하다.

이곳에서 인형은 아이들의 장난감이기도 하지만 안녕을 기원하는 신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부적이기도 하며 삶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배우가 되는가 하면 언제나 곁에 두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수집하게 만드는 차원 높은 예술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중요한 생의 순간순간을 인형과 함께 하고 있다.

조몬 시대의 토우


일본에서는 B.C. 14,000년부터 B.C.400년에 이르는 조몬 (繩文, Jomon ) 시대에 토우(土偶, dogū) 형태로 첫 인형이 발견됐다. 조몬 시대에는 주로 일본 동부 지역에서 많은 토우들이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15,000점 정도가 전해진다. 10~30cm의 높이에 이르는 이 조몬 시대의 토우 생김새는 당시 다른 나라의 토우에 비해 섬세하고 많은 장식이 되어 있다. 실제 사람의 모양을 반영하기보다 커다란 머리와 눈, 잘록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등으로 만들어져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형태다. 특히 현대의 고글을 쓴 듯한 눈이 인상적이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조몬 시대를 뒤이은 야요이((弥生, Yayoi : B.C.300~A.D.300) 시대에는 인형의 흔적이 보이지 않다가 뒤이은 고분(古墳, Kofun : A.D.300~A.D.538) 시대에는 장례식에 쓰이는 테라코타 형태의 하니와(埴輪, haniwa) 인형이 등장한다. 하니와는 사람들의 장례식에 쓰였으며 죽은 사람

의 영혼이 들어가거나

고분 시대의 하니와

나쁜 영혼을 쫓아내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헤이안(平安, Heian:794~1185) 시대인 11세기 일본 최초의 소설 <겐지 이야기>에 인형에 대한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엄마들은 아이에게 아이를 지켜주는 인형을 건네주고 또 많은 인형들이 전통적인 의식에 이용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인형놀이'를 뜻하는 일본어 '히나아쇼비(雛遊び, hinaasobi)'란 표현이 사용하기 시작한 때도 이 시대다.


피부가 새하얗고 통통한 아기의 모습을 한 고쇼(御所, gosho) 인형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왕실 인형이다. 희고 통통한 아기 모습은 원래 헤이안 시대 왕실 아기들이 아프지 말고 잘 자라기를 기원하던 인형이다. 나무를 조각해 형태를 만든 뒤 점토를 입히고 일본의 호분이라는 흰 안료를 이용해 얼굴색을 표현했다. 봉건시대였던 당시 지방에서 온 다이묘들에게 고쇼 인형을 선물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고쇼 인형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완성도가 높은 데다 귀여운 아기의 얼굴을 해서 에도 시대에 크게 발전한다.

고쇼 인형

무로마치(室町, Muromachi :1338~1578) 시대에는 칠복신(七福神, shichifukujin) 문화가 등장한다. 칠복신은 말 그대로 일곱 명의 복을 주는 신. 벤자이텐(辨財天, Benzaiten)은 유일한 여신으로 인도 행복의 여신 사라스바티(Saraswati)에서 유래했다. 칠복신에서는 중국 당나라 여인의 옷차림에 비파를 들고 있다. 비샤몬텐(毘沙門天, Bishamonten) 역시 인도에서 유래했다. 불교 사천왕 중 북방을 수호하는 신이기도 하며 사무라이의 모습이다. 무력을 이용해 가난의 신과 잡귀를 퇴치한다. 다이코쿠텐 (大黒天, Daikokuten)은 음식과 재물 복을 관장하는 신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왼손에는 복주머니, 오른손에는 요술 망치를 든 채 쌀가마니에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다. 에비스(恵比寿, Ebisu)는 어부와 상인의 신으로 오른손에는 낚싯대. 왼쪽 겨드랑이엔 커다란 도미를 끼고 있다. 후쿠로쿠주(福禄寿, Fukurokuju)는 행복과 부, 장수의 신으로 중국 도교의 신에서 유래했다. 길고 벗어진 머리에 흰 수염을 하고 있다. 주로진(寿老人, Jurōjin)은 지혜의 신으로 후쿠로쿠주처럼 중국 도교의 신에서 유래했다. 한 손에는 지팡이, 한 손에는 부채 혹은 복숭아를 들고 있다. 희고 긴 머리가 특징이다. 호테이(布袋, Hotei)는 풍요와 건강을 상징하는 신. 중국 당나라 말기 실존한 승려를 모델로 했다. 큰 자루 포대를 들고 뚱뚱한 배를 드러낸 모습이다.

보물선을 탄 칠복신


언뜻 이해하기 힘든 국적과 유래의 조합을 보이고 있는 이 칠복신은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등장해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다. 칠복신은 종종 보물선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고 인형으로도 즐겨 만들어진다. 새해 첫날에 아이들이 보물선을 탄 칠복신 그림을 베개 밑에 넣고 자면 좋은 꿈을 꾼다고 하며 이렇게 새해 첫날 좋은 꿈을 꾸게 되면 한 해의 운이 좋다는 속설이 있다.


14세기부터 일본 후쿠시마현(福島縣, Hukushima Prefecture) 아이즈(会津, Aizu) 지방에서는 오키아가리 코보시(起き上がり小法師, Okiagari Koboshi: 다시 일어나는 동자승)란 인형이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에서 전해진 부도옹(不倒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오키아가리 코보시는 무게 중심이 아래에 몰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모양으로 인내와 행운을 상징한다. 아이즈 지방에서는 새해에 가족 인원수보다 하나 더 많은 인형을 구입해 집에 진열해 두는 데 이는 가족이 늘어나기를 기원해서라고 한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언제나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를 보며 불굴의 의지를 다졌다.


일본 인형은 에도(江戶, Edo: 1603~1868) 시대에 이르러 한층 찬란한 발전을 이룬다. 에도 시대에 등장한, 히나 인형(雛人形, Hina doll)은 이 시대 인형 발전의 정점을 보여준다. 히나 인형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20년대 일본 왕실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부터 매년 3월 3일에 남녀 한 쌍의 종이 인형에 부정한 기운을 실어 물에 띄워 보내는 행사를 치렀다. 인형을 자신의 몸에 문질러 액이 인형에게 옮게 한 뒤 이렇게 띄워 보내는 의식을 나가시 비나(流し雛, nagashi bina)라고 했다.

오키아가리 코보시


에도 시대에 와서 이 나가시 비나에 왕실과 귀족 아이들이 히나 인형을 꾸며 가지고 놀던 풍습, 히나 아소비가 어우러져 히나 마츠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히나 인형은 여자 아이들의 건강과 행운, 영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 일본 인형 중에서도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히나 인형은 5~7개의 단에 빨간 천을 깔아 장식한다. 이 단 전체에는 모두 15개의 인형이 놓이는데 단마다 놓이는 인형과 장식이 모두 정해져 있다.


맨 윗단에는 '다이리 비나(内裏雛, dairibina)'라고 해서 천황과 황후의 인형을 놓는다. 천황은 홀을 들고 있고 황후는 풍성해 보이는 머리 모양을 하고 부채를 들고 있다. 뒤로는 병풍이, 앞으로는 등이 놓이고 벚꽃과 복숭아꽃이 놓인다. 두 번째 단에는 산닌칸조(三人官女, sannin kanjo)라고 세 명의 궁녀가 국자와 술주전자, 결혼식 장식등을 들고 과자가 놓인 소반 앞에 앉아있다. 세 번째 단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명의 악사, 고닌바야시(五人囃子, gonin bayashi)가 있다. 각각 크고 작은 세 개의 북과 피리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네 번째 단에는 두 명의 대신이 있는데 오른쪽의 대신은 젊고 왼쪽의 대신은 나이가 든 모습이다. 대신들 사이에 밥상이 놓인다. 다섯 번째 단에는 세 명의 시종이 있다. 이 시종의 구성은 지역마다 다르다. 히나단에는 술과 떡 등 다양한 음식들도 함께 놓이는데 거의 모든 종류가 액이나 악한 기운을 막는 역할로 쓰인다.

히나 마츠리 인형

3월 3일의 히나 마츠리가 여자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남자아이들은 5월 5일 탄코노셋쿠(端午の節句, Tango No Sekku) 축제를 펼친다. 남자아이들의 날은 단오절이기도 하고 어린이날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에는 사무라이 집 앞에 무기와 투구와 깃발을 놓아두었다. 그러던 것이 무기와 투구 대신 커다란 잉어 모양의 깃발 고이노보리(鯉のぼり)를 집 앞에 휘날리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잉어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날 집에서는 일본 설화에 전해져 오는 용맹한 소년 킨타로(金太郎, Kintaro)와 모모타로(桃太郎, Momotaro) 인형, 무사 인형 혹은 투구를 전시해 둔다. 탄코노셋쿠에 주로 전시하는 무사인형을 고가츠 (五月, Gogatsu) 인형이라고 한다.

에도 시대의 탄고노셋쿠 풍경


일본을 대표하는 인형극 분라쿠(文樂, bunraku)가 발달한 것도 이때다. 분라쿠는 대사를 말하는 사람, 다유(太夫, Tayū)와 샤미센 연주자, 인형 조종사로 구성된 종합예술로 커다란 인형을 움직이며 극을 전개해 나간다. 분라쿠에서의 인형은 실제 사람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 보일 만큼 정교하다. 인형 하나에 세 명의 조종사가 있는데 인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인형 조종사들은 얼굴까지 검게 가린다. 분라쿠가 발달하기 이전의 인형극은 어부와 상인의 신, 에비스의 신사에서 시작됐다. 무로마치 시대 때부터 일본 효고현(兵庫縣) 에비스 신사에 있던 연희패가 에비스의 모습을 한 인형을 사람의 손으로 움직이는 형태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유쾌한 인형극을 펼쳤다. 에비스 인형을 상자에 넣어 다녔다고 해서 이들을 에비스 카키(夷舁き, ebisu kaki)라고 불렀다. 에비스 카키라는 인형극이 이야기를 악기와 노래로 전하는 조루리(淨瑠璃, jōruri)라는 형식을 만나 발전한 것이 분라쿠다. 그래서 분라쿠를 닌교 조루리(人形淨瑠璃, ningyo jōruri)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비스 카키
분라쿠


독특한 방식으로 일본 옷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리는 키메코미(木目込み, Kimekomi) 인형은 1736~1741년 사이 일본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토의 카미 가모(上賀茂, Kamigamo) 신사의 장인이었던 타다시게 타카하시(Tadashige Takahashi)가 가모 강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를 이용해 만들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타다시게 타카하시는 버드나무로 사람의 모양을 만든 뒤 가늘게 몇 개의 홈을 파고 여기에 기모노 천 조각을 작게 만들어 입혔다. 얼굴은 호분을 이용해 하얗게 표현했다. 키메코미는 에도 시대에 곧 널리 퍼졌고 그 후로 대표적인 일본 인형의 한 종류로 자리 잡았다.

키메코미 인형


일본의 북동부 미야기 현(宮城縣, Miyagi Prefecture)에서 2백여 년 전 처음 등장한 코케시(小芥子, Kokeshi)는 원통형의 목각 인형이다. 몸통과 얼굴만 있는 극도로 단순한 여자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형태 속에 무심한 듯한 인형 표정과 귀여운 비율, 인형의 깜찍함이 맞물려 코케시 인형은 곧 일본 북동부의 다른 온천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코케시 인형에는 일본 절이나 신사에서 발전해 온 목각 인형의 기술이 집약된 단순함의 멋이 있었다. 얼굴에는 가느다란 눈과 거의 점으로 표현된 입 모양만 표현됐지만 그 자체로 멋진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일본 목각 인형의 발전은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에 영감을 준 칠복신 인형에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 마트료시카가 나오기 전에 칠복신은 물론 다루마(達磨, Daruma) 인형도 인형 안에 인형이 있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 달마 대사의 모양으로 만든 일본의 또 다른 오뚝이 인형 다루마는 9년 동안 면벽수행에 정진하느라 손과 발이 다 닳았다고 한다. 다루마는 달마 대사가 이런 강인함과 인내로 성취를 이룬 데서 착안해 만들어졌다. 다루마는 보통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상태인데 매년 새해를 시작할 때 결심을 세우거나 소원을 말하는 등 목적이 있을 때 한쪽 눈을 먼저 그려 넣고 목적이 이루어지면 다른 한쪽 눈을 마저 그려 넣은 뒤 태운다.

코케시 인형


다루마가 지금처럼 오뚝이 모양이 된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행운의 상징이 된 것은 1760년대 군마현(群馬縣, Gumma Prefecture )의 타카사키(高崎, Takasaki)에 있는 다루마 절 영향이다. 당시 다루마 절의 승려가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기 위한 부적의 일종으로 나무로 다루마 틀을 만들어 주었고 부근에서 잠사를 하던 농부들이 이 틀을 파피에 마셰 인형으로 만들었다. 다루마는 시간이 지나며 오뚝이 모양으로 바뀌었고 다루마는 다른 지역으로도 알려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칠전팔기의 대명사 다루마를 통해 일본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오이타현(大分縣, Ōita Prefecture) 에는 히메 다루마(姫だるま, Hime Daruma)가 유명하다. 여성 모양의 다루마 인형인 히메 다루마는 무사 집안에 시집간 여성이 혹독한 시집살이를 참고 견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날 때 건강을 바라는 목적으로, 또 집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준다.

다루마 인형

한 발을 든 고양이 모양의 마네키네코(招き猫, Manekineko) 역시 행운을 기원한다. 마네키네코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기원은 1620년께 도쿄 고토쿠지(豪徳寺, Gotokuji )로 보인다. 당시 히코네(彦根, Hikone) 영주가 새 사냥을 마치고 절 앞을 지나던 중이었는데 절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마치 영주에게 절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한쪽 발을 들고 까딱였다고 한다. 영주는 고양이가 신기해서 절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자마자 강한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영주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절에 자신의 조상을 모셨다. 고토쿠지에는 그 이후 커다란 고양이상이 세워지고 사람들도 소원을 빌고 이루어질 때마다 고양이 인형을 갖다 놓는다. 이 행운의 고양이는 어느 발을 들고 있느냐에 따라 불러들이는 행운이 다르다. 오른발을 든 고양이는 돈을, 왼발을 든 고양이는 손님을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히메 다루마


일본에서 인형은 나쁜 일은 막아주고 좋은 일을 부르는 강력하고도 친근한 삶의 동행이다. 일본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인형과 살아가면서는 어려움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 지금의 삶이 힘들어도 인형은 이런 저런 사연을 들려주며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힘을 안겨준다. 일본 사람들의 인형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이런 면에서 당연할 수 있겠다. 일본에서 인형은 그래서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아이들의 장난감에 그치는 대상이 아니라 점점 더 공을 들여 섬세하고 만들고 더 예쁘게 꾸미며 애정을 담아가는 대상이 되었다.



마네키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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