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 일본 인형 문화의 발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인형 문화가 발전하면서 인형을 구입하거나 선물하려고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인형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고 집집마다 인형으로 집의 한편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서구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일본 인형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카라쿠리(絡繰, Karakuri)라는 일본 전통 자동인형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카라쿠리는 인형 안쪽에 태엽이나 실 등을 넣어 인형이 일정한 행동을 자동으로 반복하도록 만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본 카라쿠리 인형과 유럽에서 '오토마타(automata)'라는 이름의 자동인형이 거의 동시대에 발전해 나간다.
카라쿠리 인형의 원조는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온 물시계와 톱니바퀴를 이용해 늘 남쪽을 가리키는 작은 나무 인형이 있던 지남 차(指南車, South Pointing Chariot)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카라쿠리 비슷한 인형, 혹은 기구가 그전부터 단순한 형태로 꾸준히 전해 내려왔다. 에도 시대가 시작되기 얼마 전인 1551년 스페인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서양의 태엽시계를 처음 전달했다.
그러나 이런 서구 문명의 유입도 잠시, 도쿠가와(德川, Tokugawa) 막부는 자국민들의 해외여행을 금지시키고 쇄국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런 중에도 난학(蘭學, Rangagu)이라고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문물은 받아들였다. 이는 카라 쿠리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새로운 기술에 목말랐던 많은 카라쿠리 장인들은 18세기 중반 외국인들이 올 수 있었던 유일한 항구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시계 장인들이 왔을 때 이들을 만나 많은 지식을 습득했고 심지어 한 네덜란드 장인에게는 일본에 남아서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했다.
일본 카라쿠리는 네덜란드의 기술과 만나 찬란하게 꽃 피웠다. 카라쿠리는 이전까지 인형의 아름다움에 탐미하던 일본인들에게 아름다움은 물론 즐거움과 놀라움을 함께 안겨주며 큰 사랑을 받았다.
카라쿠리는 자시키(座敷, Zashiki) 카라쿠리, 다시(山車, Dashi) 카라쿠리, 부타이(舞臺, Butai) 카라쿠리의 세 종류로 나뉜다. 자시키 카라쿠리는 작은 형태의 카라쿠리로 주로 반복해서 차(茶)를 따르는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진다. 다시 카라쿠리는 축제 때 쓰이는 퍼레이드 차량에 쓰이고 부타이 카라쿠리는 주로 무대에서 공연할 때 쓰였다.
일본 기업 도시바의 창업주 다나카 히사시게(田中 久重, Tanaka Hisashige)가 뛰어난 카라쿠리 장인으로 훌륭한 카라쿠리 작품들과 만년 시계를 남겼다.
17세기 후쿠오카(福岡, Fukuoka)의 하카타(博多, Hakata)에서는 초벌구이 된 도자기 재질에 밝고 화려한 색이 칠해진 인형이 선보인다. 하카타 인형은 당시 도공들이 영주였던 구로다 나가사마에게 선물한 데서 시작됐다. 지역에서 꾸준히 사랑받던 하카타 인형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되어 세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의 표현, 가늘고 분위기 있게 표현된 얼굴, 실제처럼 부드럽게 그려진 옷 등은 하카타 인형을 한층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하카타 인형 장인들은 보다 사실적이며 정교한 인형을 만들기 위해 이론 공부를 병행해 가며 완성도에 공을 기울였고 1925년 개최된 현대 장식미술 및 산업미술 국제전에서 일본 하카타 인형이 금메달과 은메달까지 수상하며 수상하게 됐다. 하카타 인형은 세계 2차 대전 중 일본에 주둔했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미군들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귀여운 사내 혹은 여자 아이의 모습을 한 이치마츠(市松, Ichmatsu) 인형은 하카타 인형보다 먼저 미국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치마츠 인형은 에도 시대 중반이었던 18세기 교토에서 만들어졌다. 젊은 사내 역할을 주로 맡았던 가부키 배우 사노가와 이치마츠(佐野川市松, Sanogawa Ichmatsu)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인형은 전형적인 일본 전통의 검은 머리에 구슬 눈을 하고 실크로 만들어진 일본 전통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엔 남자 모습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 아이 인형으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많은 일본 인형이 피부를 새하얗게 표현해 왔던 데 반해 이치마츠 인형은 실제에 가까운 피부색으로 생동감을 줬고 인체 비율도 실제에 가깝게 만들었다. 화사하고 깜찍한 데다 예술적 완성도까지 갖춘 이치마츠 인형은 19세기와 20세기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형 종류의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수교를 거부하던 일본으로부터 개항을 이끌어낸 미국의 매튜 페리(Mettew Perry) 제독은 1854년 일본에 총기류와 무전기 등을 선물했다. 일본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다양한 종류의 수공예품을 전달했는데 여기에는 이치마츠 인형과 고쇼 인형이 다량 포함됐다. 일본 인형을 처음 접한 미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솜씨에 놀랐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독일에도 일본 인형이 전해진다. 당시 유럽에서도 인형이 뛰어난 품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부 독일 인형은 일본 이치마츠 인형 형식을 응용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본은 1870년부터 인형을 유럽과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인형은 다른 공예품들 못지않게 주요한 수출 품목이 되었다.
일본은 외국과 인형을 통한 교류도 활발히 했다. 1923년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자 미국의 어린이들은 일본 어린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12,000개의 인형을 전달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 인형을 '파란 눈 인형'이라 부르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1927년 각 지역 장인들이 정성 들여 만든 58개의 이치 마츠 인형을 편지와 함께 미국에 보냈다. 58개의 지역에서 하나씩 만들어 낸 지역 특산 인형들로 80cm가 넘는 큰 키의 인형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높은 완성도에 일본의 문화가 그대로 담긴 일본 '우정의 인형'은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되어 미 전역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일본의 고풍스러운 이치마츠 인형은 인형 수집가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일본 인형은 애호품이 되어갔다.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미세모노(見世物, misemono)라고 해서 가부키나 분라쿠, 일본의 가면극 노(能, Noh)처럼 정통 공연과는 차별되는 대중 공연 열풍이 일었다. 절이나 신사 등에서 연중 몇 차례에 걸쳐서 이 미세모노를 선보이기도 했다. 미세모노는 전시나 공연의 형태로 대중들을 상대로 펼쳐졌고 20세기 초까지 다양하고 기묘한 레퍼토리로 인기를 얻었다.
이 미세모노에 이키(生, Iki)라는 실제 사람 모양의 인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마네킹에 비견될 만한 이키는 등장부터 많은 화제를 낳았다. 처음에는 실제 사람 크기의 사이즈로 비교적 거칠게 만들어졌던 이키 인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함이 더해져서 실제 사람을 연상케 했고 이는 때로는 환상적이면서도 또 간혹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도 해서 많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인형의 크기를 제한하기도 했다.
마츠모토 키사부로(松本喜三郎, Matsumoto Kisaburo)와 야스모토 카메하치(安本亀八, Yasumoto Kamehachi)은 사람의 얼굴이며 표정, 몸짓, 옷차림까지도 아름답게 재현한 이키 인형 작가로 유명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본에서는 비스크 인형이 널리 만들어졌다. 이는 세계 1차 대전과 연관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비스크 인형 수요가 많았는데 이 두 나라가 전쟁통에 인형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형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일본이 이 인형 수요들을 모두 떠맡아 비스크 인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큐피(Kewpie)는 물론 많은 기술이 요구되는 독일 인형들을 모두 그대로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도 만들어냈다.
일본 노리타케 컴퍼니의 전신인 모리무라(森村, Morimura) 브라더스가 이때 다양한 인형들을 생산했다. 인형 문화가 일찍이 발달했던 일본에서 유럽과 미에서 만들어내던 인형을 그대로 만들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본은 여기에 일본의 개성을 살린 새로운 시도들을 더하면서 자신들의 뛰어난 인형 문화를 널리 알렸다.
깊고도 다양하게 발전해 역사를 통해 인형은 일본의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형이 이토록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에서 지금처럼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애니메이션이 발달할 수 있었을까. 애니메이션에서의 외모를 그대로 구현해 묘사한 구체관절 인형, 피겨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일본의 오래되고도 유난한 인형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정체성의 한 축을 단단히 지탱하며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