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인형의 역사에서 즐겨 쓰이는 재료는 단연 나무였다. 재료를 구하기도 쉽고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기도 쉬웠다. 고대 이집트는 물론, 고대 로마 시절에도 많은 인형들이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17세기 영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목각 인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영국의 목각 인형은 정교하고 세련된 당시 귀족의 옷차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68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53cm 높이의 목각인형 <늙은 참주(Old Pretender: 제임스 2세 왕가가 소유했던 인형이라 소유자 가문 제임스 프란시스 스튜어트의 애칭이 이름으로 붙여짐)>는 얼굴은 물론이고 옷과 가구까지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져 당대의 뛰어난 장인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형의 얼굴에는 동그란 검은 점들이 있는데 이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던 뷰티 패치(beauty patch, 용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실크나 벨벳으로 얼굴에 붙임)이다.
1690년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클래펌 경과 부인(Lady And Lord Clapham, 높이 48cm)>은 참주 인형과 비슷한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섬세한 복식과 가구의 재현으로 보아 아이들에게 주는 놀이용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인형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목각 인형은 주로 영국 런던 주위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처럼 상당히 수준이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은 몸체와 팔, 다리가 구분된다. 허리를 잘록하게 표현하고 팔의 위쪽 부분은 천으로 아래쪽은 나무로 만드는데 손가락 모양까지 정교하게 깎았다. 상체와 다리는 제혀맞춤(나무의 한쪽 측면에 홈을 파고 다른 쪽 측면에 내밈을 만들어 맞추는 방식)을 했다. 인형 전체 바탕에 젯소를 칠한 뒤에 얼굴 부분을 그려 넣었다. 옷은 입고 벗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초기의 목각인형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정교해진다 눈은 아몬드처럼 크고 둥글게 만들어 입체감을 살렸다. 눈동자는 이전처럼 물감으로 그려 넣는 대신 구슬을 넣었다. 어깨는 조금 더 좁고 둥글게, 허리는 더 잘록하게 해서 맵시를 살렸다. 눈썹은 길게, 가느다란 점무늬를 연속적으로 그려 분위기를 살렸다. 눈 주위 역시 이렇게 장식하기도 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이용했다.
옷은 더 정교해졌다. 실제 옷을 그대로 재현해 시계까지 달아 장식하기도 하고 속옷도 실제처럼 자수를 놓아 옷 안에 입혔다. 남자 인형보다는 여자 인형이 월등히 많았다. 17세기 말, 그리고 18세기 초에 만든 인형은 <앤 여왕 인형(Queen Anne Doll)>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엄밀히 따지자면 영국 초기의 이 목각인형들은 대부분 앤 여왕의 재위 기간인 1702~1714년 보다는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만들어진 인형이라 정확한 명칭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불렸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불리고 있다. 18세기 중반 레티샤 클라크 파월(Letitia Clark Powell,1754~1814)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입었던 옷들을 인형 옷으로 똑같이 만들어 입히는 식으로 13개의 인형을 남기기도 했다. 앤 여왕 인형은 독특한 모양과 정교한 옷 장식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어 앤 여왕 인형과 같은 스타일의 인형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귀족과 왕실의 옷을 재현해 낸 영국의 초기 목각인형은 이후 찬란하게 발전할 유럽 인형 역사의 예고편이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인형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에 고무된 영국 인형 제작자들은 사람의 피부를 실감 나게 재현할 재료로 밀랍(wax)을 선택했다. 밀랍으로 머리와 팔, 다리를 만들어 솜이 든 몸체와 연결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밀랍인형은 큰 인기를 얻었다.
오구스타 몬타나리(Augusta Montanary) 부인은 뛰어난 솜씨로 빅토리아 여왕의 아이들 얼굴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여왕의 후견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피에로티(Pierotti) 가문은 밀랍 모형 제작가였는데 밀랍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데다 눈동자 표현 등에 공을 들여 사람의 표정과 감성이 느껴지는 밀랍 인형, 유명인을 그대로 만든 인형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Victoria And Albert) 박물관에는 <프린세스 데이지(Princess Daisy)>라는 아기 모양의 인형이 있다. 프린세스 데이지는 인형도 뛰어나지만 화려하고 놀라운 솜씨로 백여 개에 이르는 완벽한 인형 레이에트(layette: 아기 옷, 혹은 갓난아이 용품 일습을 갖춘 것)를 구성해 눈길을 사로잡는다. 캐노피가 있는 아기 침대는 물론이고 드레스, 모자, 모자 스탠드, 금으로 만든 인형 핀과 팔찌, 진주로 만든 아기 인형 목걸이 등이 모두 포함됐다.
프린세스 데이지는 189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살던 그로테 트위스(Grothe Twiss) 여사가 네덜란드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자선행사 흥행을 성공시키기 위해 영국에서 밀랍인형을 구입하고 아기 용품은 장인들에게 부탁해 만든 것이다. 1895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녀는 나중에 영국 왕 조지 5세(King George V)와 메리 여왕(Queen Mary)의 2세 메리 공주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목각 인형과 밀랍인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형이 발전했던 영국은 그러나 19세기 후반, 독일과 프랑스가 앞다투어 도자기 인형을 만들어 낼 때 이에 발맞춰 발전하지 못했다. 독일이 전쟁에 휩쓸리면서 인형을 만들어내지 못하자 급조된 인형들을 만들어냈고 이마저도 아시아의 저 먼 나라 일본에 밀리는 형국이었다.
영국에서는 1850년을 전후해 헝겊 인형이 인기가 많았다. 헝겊 인형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집에서 만들어지곤 했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집에서만 만들어 오던 헝겊인형을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천에 그림을 그려 프린트해서 오린 뒤 바느질하는 형태의 헝겊 인형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더 발전해 천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고 다른 재질의 인형처럼 실제에 가까운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얼굴 모양은 그려 넣기도 했고 자수를 해 넣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털실을 쓰거나 사람 머리카락 혹은 모헤어로 만든 가발을 머리에 붙였다.
스토키네트(stokinette, 메리야스 짜기: 양말로 시작된 짜기 방법, 울 혹은 실크로 만들었다) 방식으로 짜인 실크나 천을 이용해 몸체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1890년 이후에는 골리워그(Golliwogg)라는 흑인 인형이 등장했다. 골리워그는 영국의 플로렌스 케이트 업턴(Florence Kate Upton)이 엄마와 함께 만든 삽화가 있는 동화책 <두 네덜란드 인형과 골리워그의 모험(The Adventures of Two Dutch Dolls and a Golliwogg)>에 나오는 상상 속의 주인공이었다. 골리워그는 까만 천으로 만들었는데 머리는 부스스하고 눈은 흰 테두리로 그려졌으며 입술은 두텁게 그려졌다.
책이 인기를 얻으면서 골리워그 캐릭터도 사랑을 받았고 골리워그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20세기까지 큰 인기를 누려 많은 광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골리워그의 외모가 흑인의 신체 묘사를 과장되게 하는 인종차별의 요소가 강하다는 논란이 일면서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1920년대 이후 영국에서는 새로운 헝겊 인형들이 등장했다. 영국 헝겊 인형 회사 중 명성이 높았던 곳은 채드 밸리(Chad Valley)사. 벨벳 혹은 펠트로 인형을 만들었다. 천 재질을 이용해 인형을 만들면서도 얼굴 표정과 옷차림이 섬세하고 정교했다. 채드 밸리 사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같은 동화 속 인물은 물론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도 인형으로 제작하는 등 천 재질로 만들 수 있는 인형의 범주를 크게 확장시키고 질적 수준과 예술성도 한층 올려놓았다.
1952년부터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페기 니스벳(Peggy Nisbet)은 헨리 8세와 그의 6명에 이르는 부인들을 비롯한 영국의 여러 왕과 여왕들, 이집트의 투탕카멘, 교황 등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을 그대로 묘사하고 철저한 고증으로 복식을 재현해 낸 밀랍 재질의 초상 인형(portrait doll)으로 유명하다. 페기 니스벳이 1959년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딸 앨리슨 니스벳(Alison Nisbet)이 뒤를 이어 1985년까지 초상 인형을 생산했다. 니스벳 인형은 각 인형 들을 3,000~5,000 점 한정판으로 만들었다.
영국 최대 도자기 그룹인 로열 덜튼(Royal Doulton)사도 1980년대부터 수집가들을 위해 수준 높은 인형 제작에 참여했다. 뛰어난 도자기 제작 실력에 기반해 부드럽고 곱게 그려진 얼굴로 인기를 얻었다. 인형 전체를 도자기로 만들기도 했고 얼굴과 팔, 다리를 따로 도자기로 만들어 면직물로 된 몸체와 연결시키는 방식으로도 만들었다. 로열 덜튼은 특히 고급스러운 옷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고 이를 위해 니스벳 사와 합작했다. 로열 덜튼의 인형 제작 솜씨와 니스벳 사의 옷 제작 솜씨가 빛을 발휘해 훌륭한 수집가용 인형들이 만들어졌다.
미국에 바비가 있다면 영국엔 신디(Sindy)가 있다. 영국의 페디그리(Pedigree) 인형 회사는 미국 바비 인형을 만들었던 마텔(Mattel)사로부터 바비의 라이선스를 얻으라는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자체 시장 조사 결과 영국인들은 바비와 같은 유형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페디그리사는 마텔 사의 바비 대신 아이디얼 토이(Ideal Toy) 사에서 나온, 친근한 외모 타미(Tammy) 인형의 라이선스를 얻는다. 1966년에는 신디보다 조금 작은 키에 귀여운 외모를 강조한 동생 패치(Patch)도 선보인다.
1963년 처음 나온 신디는 친근하고 귀여운 외모로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지금까지 미국 회사에 판권을 넘기고 바비와의 소송에 휘말리는 등 많은 고비를 겪어왔지만 몇 번 얼굴 모양을 바꾸어 가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유럽에서 인형은 비슷한 시기에 발전해 나가기 시작한다.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도자기 인형의 발전이 더디긴 했지만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자기 인형은 영국 앤 여왕의 인형을 만들 수 없다. 인형은 그렇게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개성 속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