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유럽에서 독일과 더불어 아름답고 섬세한 인형들을 잇따라 탄생시킨 주역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프랑스에서는 인형 역시 패션에서 앞서 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루이 14세(Louis XIV)의 영향이 크다. 루이 14세가 재위할 당시 유럽 패션의 선두주자는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세계로 뻗어나가던 스페인 왕실은 고급스러운 직물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패션이 스페인을 앞서가길 원했다. 프랑스의 감각적인 패션으로 경쟁력을 가지고 싶었던 루이 14세는 판도라(pandora)라는 이름의 패션 인형을 활용했다. (판도라를 루이 14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14세기께부터 판도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판도라는 사람의 실물 크기에 가까운 나무 인형이었다. 나무 재질에 젯소칠을 한 뒤 여기에 사람 옷을 입힌, 작은 마네킹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판도라에 대한 첫 기록은 1391년으로 나온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샤를 6세(Charles VI)가 당대 화려한 패션으로 유명했던 왕비 이자보(Isabeau de Baviere)의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판도라에 입혀 영국 왕실에 보낸 기록이 있다.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여왕(Isabel I)도 1497년 프랑스에서 보내온 판도라를 받았다고 한다. 16세기부터 프랑스 왕실에서는 장인에게 특별 주문해 나무로 만든 몸체에 화려한 옷을 입힌 인형을 소장했다. 루이 13세(Louis XIII)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여러 개의 인형과 인형을 끄는 마차 모형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루이 14세는 당대에 유행하던 프랑스의 패션을 이 판도라에 입혀 유럽 각 국의 왕실에 보냈다.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옷은 물론 신발과 액세서리, 모자까지 실제 그대로 재현했다. 이렇게 유럽 각 국 왕실에 보내진 옷은 유용하고 값진 패턴이 되어 실제 사람들의 몸에 맞게 재단할 수 있게 되었다.
1842년 피에르 프랑스와 쥬모우(Pierre François Jumeau)가 나무나 가죽으로 몸체를 만든 뒤 옷을 입힐 수 있는 인형을 만들었다. 1867년 아들 에밀(Emile)이 경영에 참여했다. 1877년 에밀은 정교한 비스크 인형 머리에 복합 재료 몸체가 있는 인형 '베베 쥬모우(Bébés Jumeau)'를 선보인다.
베베 쥬모우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살아있는 아이를 보는 듯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질 좋은 비스크 인형 머리를 사용했는데 이 머리는 옆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나무와 복합 재료로 만들어진 몸체는 실제 사람의 몸에 더 가깝게 팔꿈치와 어깨를 구형 관절로 연결했고 배와 가슴 부분도 굴곡을 주어 가슴과 배 부분이 완만하게 부푼 모습으로 만들었다. 몸체는 사람 피부 톤의 바니시로 다섯 번 칠해 주었다.
쥬모우 인형의 생동감 있는 얼굴은 프랑스 앙리 4세(Henri IV)가 네 살 때 모습을 그림 초상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통한 볼에 양 뺨을 볼그스레하게 표현하고 눈동자는 실제 사람이 하고 있는 듯 사람과 꼭 닮은 구슬을 넣었다. 베베 쥬모우의 특징은 인형을 어린아이의 모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손은 통통하고 작은 모습이다.
쥬모우 인형은 살짝 벌린 듯 다문 입술, 사람의 눈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색의 눈동자, 그리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패션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쥬모우 인형의 옷은 외관에서부터 레이스와 단추, 주름 장식 등 실제 옷을 그대로 재현해 입히는 가 하면 일일이 수작업한 레이스가 달린 페티코트, 양말과 신발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사람의 패션을 재현했다. 베베 쥬모우는 1870년부터 1890년까지 20여 년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며 사랑받았다.
현재까지도 베베 쥬모우에 대한 선호도는 높은 편이어서 많은 현대 작가나 인형 제작자들이 베베 쥬모우 양식의 인형과 옷을 복제해 만들어 내고 있다.
1866년에는 베베 브루(Bébé Bru)라는 인형이 탄생해서 쥬모우와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브루 인형은 역시 쥬모우 인형처럼 목을 돌릴 수 있는 비스크 얼굴과 어깨, 비스크 손목과 손에 가죽이나 복합재료의 몸체로 구성된다. 우수한 품질과 디테일한 패션은 베베 쥬모우와 닮았지만 브루 인형들은 입술을 살짝 벌린 틈을 두 개의 이가 어렴풋이 보이도록 만들어 신비로운 느낌을 더했다.
쥬모우와 브루는 고급스러운 품질과 인형에 더해진 완성도 높은 패션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 인형 제작자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졌고 프랑스에서도 독일의 포슬린, 비스크 인형 수입이 늘어나 프랑스 인형 제작자들은 위기를 맞았다. 이에 쥬모우와 브루를 비롯한 프랑스의 10개 인형 회사들은 1899년에 S.F.B.J.(Société Française de Fabrication de Bébés et Joutes: 프랑스 인형 완구 협회)를 결성해서 S.F.B.J.라는 단일 브랜드로 1950년까지 인형을 만들어 냈다.
프랑스의 뛰어나 비스크 인형들은 그러나 두 번의 세계 전쟁과 더 편하고 싼 소재의 인형들이 대량 생산되는 상황을 맞으면서 어려움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프랑스 인형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비스크를 더욱 고급스럽게 표현하면서 인형의 격을 한층 높였고 특히 인형뿐 아니라 인형이 입고 있는 패션의 완성도가 높다는 데 있다.
프랑스 인형에서 발전한 또 다른 영역은 오토마타(Automata), 자동인형이다. 단수로는 오토마톤(Automaton), 복수로 오토마타다. 기계 장치를 이용해 인형이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오토마톤에 대한 연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프랑스에서는 특히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에 의해 놀랍게 발전했다.
자크 드 보캉송은 1738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1.4미터 높이의 인물상이 실제 사람처럼 입으로 바람을 불고 손을 움직여 플루트를 연주하는 <플루트 연주자>를 선보였다. 19세기까지 오토마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오토마톤, 글을 쓰는 오토마톤, 움직이며 "엄마!"소리를 내는 오토마톤까지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의 오토마타가 선보였다. 오토마톤의 획기적이고 놀라운 기능은 당대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19세기까지 다양한 오토마타가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 더 발전했다.
시계 제작자였던 쥘 니콜라 스타이너(Jules Nicholas Steiner)는 1855년부터 오토마톤 인형을 만들었다. 스타이너는 매우 복잡하고 고가였던 오토마톤 대신 비스크 머리에 복합 재료 몸체의 인형에 옷을 입히고 인형 안쪽으로 간단한 장치들을 넣어 인형이 움직이게 했다. 태엽을 돌리면 앞뒤로 움직이면서 손을 들고 "엄마!"라고 부르는 인형이라든가 공을 차는 모양을 반복하는 인형 등을 만들어냈다. 스타이너는 인형의 기능 못지않게 인형 자체의 완성도도 높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위아래 이들이 보이는 특성을 보인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서는 '상통(Santon)'이라는 이름의 채색 점토 인형을 만든다. '상통'은 '작은 성자'라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프로방스 지역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가 될 때면 성경 속 인물들을 작은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 말구유를 장식하고 공연을 펼쳐왔다고 한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로 혁명 정부가 자정 미사와 말구유 공연을 금지시켰다. 이에 지역 장인들이 거푸집을 이용한 새로운 인형을 만들어 채색해 왔던 데서 유래한다. 프로방스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못하는 대신 집에서 상통으로 구유를 꾸민 것이다. 성경 속 인물을 대신 만들던 상통은 사람들의 정겨운 일상 속 모습을 담아 오고 있다.
프티콜랭(Petitcolling)사는 1920년대 프랑스 각 지역 의상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재현해 22cm 높이의 셀룰로이드 몸체에 입힌 인형을 내놓았다. 지금도 어린이들을 위한 인형을 만들어 내는 프티콜랭 사의 프랑스 지역 의상 인형은 작은 사이즈의 인형에도 프랑스 각 지역의 특징이 잘 살아나는 옷을 입혀 인형의 가치를 높였다.
패션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 시대를 앞서 나가는 기술에 대한 뜨거운 호기심을 가진 프랑스는 인형을 통해서도 이렇게 시대와 함께 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