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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국-결핍이 대중화 원동력으로

by Jino

미국은 유럽에 비해 역사가 길지 않은 탓에 초창기 인형 문화의 발전이 더뎠다. 그래서 유럽 인형을 선호했고 미국 내에서 인형을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제약 조건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국 인형의 발전을 유럽과는 또 다른 다양한 방향으로 끌어낸 측면도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 내 많은 인형 제작자들은 소일거리 삼아 인형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회사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몇몇 이름난 제작자들도 주로 유럽, 특히 독일에서 이주해 온 작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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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이너 사의 파피에 마세 인형

독일에서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간 루트비히 그라이너(Ludwig Greiner)는 1872년 파피에 마세 인형을 선보인다. 파피에 마세 재료에도 고급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하얀 종이를 빻아 호분을 더했다. 그라이너의 인형은 13~36인치(31~91cm)의 큰 사이즈로 만들어졌다. 어깨가 있는 머리로 만들어 천과 연결시켰다. 그라이너의 초기 인형은 옷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편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알베르트 숀헛(Albert Schoenhut)은 1872년 독일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주해 왔다. 가족 대대로 목각 인형을 만들어 왔던 숀헛은 금속 스프링을 연결해 관절이 움적일 수 있는 고급스럽고 완성도 높은 목각 인형을 선보였다. 당대 인형 쪽에서는 과거의 재료로 여겨졌던 목각 인형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순간이기도 했다. 숀헌은 나무 재료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얼굴과 몸체를 만들었고 옷의 표현에도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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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헛의 목각 인형들


1926년에 뉴욕에서 마담 알렉산더(Madame Alexander) 인형 회사가 만들어진다. 로즈(Rose)와 베아트리체(Beatrice) 자매가 만든 이 회사는 1934년 당시 유행하던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 대신 캐나다에서 태어난 다섯 쌍둥이를 인형으로 만들어 화제를 모았고 이 다섯 쌍둥이 인형은 마담 알렉산더만 만들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다섯 쌍둥이로 소개되었던 실제 자매들의 삶이 불행했다고 전해졌다.) 마담 알렉산더의 인형은 동그란 눈과 작고 통통한 몸체의 인형들로 다양한 시리즈들을 만들어 내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마담 알렉산더 인형


미국에서는 특이하게도 헝겊 인형이 발전한다. 헝겊 인형은 19세기 이전까지는 집에서 엄마들이 만들어서 아이에게 주는 대상이었지 상업적으로 만들어져서 팔리는 대상은 아니었다. 펠트를 이용한 인형들이 먼저 나왔고 부드러운 헝겊들로도 인형이 만들어졌다. 얼굴은 물감으로 그리고 머리카락은 실이나 가발을 이용했다.


커트지 (Cut Out) 인형도 20세기 초부터 미국에 등장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천에 인형의 앞 뒷면을 프린트해 이를 오리고 솜을 넣어서 인형이 되도록 하는 형태다. 1916년에 판매된 헐버트 패브릭(Hulbert Fabrics)사의 커트지 인형천은 1970년대 다시 복제 생산이 되기도 했다.


미국의 작가 조니 그루엘(Jonny Gruelle)의 그림책에 등장하던 주인공 래기디 앤(Raggedy Ann:누더기 인형으로 종종 번역되지만 책 내용으로 보면 '헝겊 인형'이 더 적절하다)이 1915년 인형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 빨간 머리카락에 물감으로 그려진 빨간 삼각형 코와 눈에 웃는 얼굴의 앤은 많은 모험을 펼치고 나중에는 사탕 심장을 가지게 된 사실에 행복해한다. 래기디 앤의 인기에 힘입어 래기디 앤디(Raggedy Andy)도 등장한다.

antique-vintage-painted-cloth-rag_1_b806d641e0a3bd7e789096ee2d86f8dc.jpg 헐버트 패브릭의 커트지


이팡비(Effangbee)사는 다양한 사이즈의 펫시(Patsy)인형으로 인기를 얻었다. 아주 작은 사이즈에서 26인치(66cm)에 이르는 팻시는 사이즈에 따라 이름도 다르다. 앙증맞고 귀여운 꼬마 인형 모습을 하고 있다. 이팡비는 이후로도 다양한 인형들을 만들어 오고 있다.

다운로드 (1).jpg 래기디 앤과 앤디

세계 2차 대전 이후인 1940년대 후반 인형 발전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다. 고급스러운 인형을 꾸준히 만들어 오던 프랑스나 독일이 인형을 더 만들어 낼 수 없게 된 그 시기에 이전의 셀룰로이드 보다 더 강력한 재료인 플라스틱과 폴리에틸렌, 비닐 복합 재료가 쓰이게 됐다.

특히 이 새로운 재료들은 여러 모로 편리했는데 정교하게 섬세한 틀로 인형 모양을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머리카락을 심을 수 있었다. 머리에는 단단한 성질의 재료를, 몸에는 더 부드러운 성질의 재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인형은 어느새 대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팡비의 팻시


1948년에 설립된 보그(Vogue) 인형 회사는 지니 (Ginny)라는 이름의 인형을 내놓는다. 지니로 시작된 이 라인은 지니의 유모 지네트(Ginnette), 언니 질(Jill), 그리고 질의 남자 친구 제프(Jeff)를 잇따라 만들어 인형 가족을 만들어 낸다. 20cm 정도의 작고 아담한 규모에 상황에 따른 다양한 옷과 소품, 여기에 지니의 애견까지 등장시켜 새로운 패션 인형의 시대를 알리며 사랑받았다.


뉴욕의 아이디얼(Ideal Novelty and Toy Company)은 1930년대 영화부터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는데 아이디얼 사에서 꾸준히 만들어 온 대표적인 인형이 셜리 템플(Shirly Temple)이다.


1959년 마텔(Mattel) 사의 바비(Barbie)는 가히 인형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할 만큼 엄청난 선풍을 일으켰다.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어른 모양의 패션 인형 바비는 원래 독일 패션 인형 빌트 릴리(Bild Lilli) 외모의 30cm 사이즈 인형으로 만들어졌으나 여러 차례 얼굴에 변화를 주었고 무수한 옷과 소품을 만들어 내면서 여자 아이들의 마음을 샀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인형 콜렉터들을 위한 포슬린 인형의 생산이 활기를 띠고 있다. 애쉬톤 드레이크(Ashton Drake), 댄버리 민트(Danbury Mint), 프랭클린 민트(Franklin Mint) 사 등이 포슬린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의상을 한 고급스러운 인형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보그사의 지니 인형


유럽에서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인형은 이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발전했고 이 같은 현상은 미국에서 두드러졌다. 미국의 초기 인형은 유럽 인형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지거나 부족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결핍이 보다 새롭고 다양하면서도 친근한 인형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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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포슬린 인형. 왼쪽부터 프랭클린 민트, 애쉬톤 드레이크, 댄버리 민트 사의 인형.

오랜 인류의 친구 인형이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갈 지 지켜보는 것도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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