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화의 격률 : 양의 격률 maxim of quantity
안물안궁
필요한 만큼의 정보를 주고받을 때 대화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불필요한 정보를 말하거나 반대로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는 것은 양의 격률을 어겨 대화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한다. 양의 격률을 지키지 못할 때 대화는 지루하거나 부담스러워진다. 아무리 쾌활한 수다쟁이라도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지루하고, 과묵한 사람과는 쉽게 가까워지기 어려운 것도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양의 격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요.’ 라는 말을 면전에서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요)‘이라는 표현이 실제 대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라며 상대방의 말을 막아서더라도 가까운 사이에서는 그렇게 큰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를 지루하게 만든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대화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혹은 사실을 어디까지 노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개 말하는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 한쪽에서 하려던 말을 늘어놓는동안 다른 한쪽은 꼼짝없이 듣게되는 경우가 많다. 일방적인 자기 노출은 지루한 수다나 하소연으로 끝나기 쉽다. 이때 듣는 사람이 비슷한 수준의 자기 노출로 이야기를 맞받아친다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양의 격률을 지키게 되지만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장황한 설명이나 지나치게 깊은 수준의 자기노출을 계속한다면 상대는 꽤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제가 처음 발견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된 걸요.”
H가 일하는 아동보호센터에는 누구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습관처럼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8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목격했고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새로 오신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은 모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H도 몹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위로해야 할까? 내 얘기를 해야 하나? 시험이 코앞이니 대수롭지 않은 척 수업을 해야 할까?’ 일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이~차암~ 선생님은 처음 봤는데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해요. 아무튼 전 선생님이 너무너무 좋아요.” 아이가 웃으며 손사래를 친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대화는 거기서 일단락 되었다. 그날 H는 아이의 사연을 듣자마자 당황하여 허둥지둥하기까지 했으니 그들의 첫 만남이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검정고시가 끝나고 헤어지던 날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면서 관계는 해피엔딩으로 이어졌지만 그 당시 관계에 서툴렀던 그들은 그렇게 첫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아이는 왜 처음 보는 H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많은 사람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나누는 것이 친밀함의 기준이라고 오해한다. 앞서 상대방을 ‘안다’는 것이 사적인 정보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의 여부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 나눈 바 있다. 마찬가지로 가까워지기도 전에 무작정 꺼내놓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친밀한 대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큰맘 먹고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당신도 한 가지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눠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은근히 강요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친밀감과 관계지수를 연구한 한 실험에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는 한순간에 모든 경계를 허무는 태도를 보였다(김경희, 2003).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데서 시작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관계맺기는 비단 경험이 적고 관계에 서툰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 맺기에는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이것이 양의 격률의 전제가 되는 상호교류의 맥락(the current purposes of exchange)이다.
친절한 상담사의 답답한 연애상담
대화에서 질문과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즘은 어디서나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서 그 틈에서 시달리다보면 역시 최고의 미덕은 경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그런데 모든 대화에서 자기 얘기는 하지않고 질문과 피드백만 하는 상대를 만난다면 어떨까? 아마 수다쟁이보다 강적을 만났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L은 최근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학교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G였다. 그녀는 동창들 사이에서도 항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착한 친구로 통한다. 그런 그녀가 상담 심리를 전공하고 학교에서 상담사로 일한다고 했을 때 동창들은 하나같이 이거야말로 그녀의 천직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G가 마음이 힘들다며 전화로 어렵게 운을 떼었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은 남자친구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고 당사자에게 물어보려니 용기가 나지않아서 G는 그를 소개해 준 지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가식적인 사람과는 더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상냥하고 항상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그녀가 가식적이라니 누가 들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대체 그 남자는 어째서 말도 안되는 핑계로 헤어지자고 했을까를 고민하다가 L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G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처음 만나서 한동안은 같이 있어도 도통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남자 친구의 어떤 질문에도 그녀의 대답은 “아, 그렇죠? 저도 마찬가지에요.호.호.호.”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말은 언제나 질문과 공감이 대부분이었다. 이따금씩 그녀가 평소보다 격하게 공감할 때, 상대방은 자신이 웅변이 아닌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G는 상담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와는 정 반대의 인생을 살고있는 듯 했다.
항상 듣기만 하면서 감정노동을 자처하는 것은 그녀에게 일종의 직업병이다. 습관적으로 듣는 사람의 역할에 너무 충실하다보니 때에 따라서는 이 선한 배려가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드라마 명대사처럼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라며 관계에 선을 긋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한쪽에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상대방에게서는 관계로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니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을 ‘가식적인 사람’이라는 볼멘소리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화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교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의 격률maxim of quantity’이 지켜진다. 이때 의도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에게로 미루는 일이 반복되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배려로 인식되지 않는다. 관계맺기에서 경청만큼 중요한 것은 서로를 드러내고 수용하는 과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