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진 코치 May 28. 2020

내가 보는 내가 다가 아니다

조하리의 창 : 주장형 의사소통 (ft. 누구에게 피드백을 구할 것인가)

주장형 의사소통 : ‘내가 보는 내가 다가 아니다.’




눈먼 영역이 넓은 주장형 의사소통



J는 최근 모임에서 ‘자기중심적'인 명상가를 만났다. ‘자기중심적’이라는 표현이 오랜시간 성찰하며 심신을 다져온 명상가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를 한 마디로 설명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며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연이 끝날 때쯤에는 자신이 진행하는 명상 클래스의 홍보도 잊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사람들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쉬는 시간에 옆 테이블에서 수군거리는 소릴 들으니 오래전부터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지금껏 그가 말한대로 수없이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깊은 자아성찰만으로 자신을 완전히 알아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위 그래프와 같이 눈 먼 영역에서 ‘주장형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 자기표현을 잘 하기 때문에 솔직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피드백을 수용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몰두할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결국은 어떻게든 알게 되지만 누군가의 호통이나 뒷담화를 듣고 뒤통수가 화끈거릴 때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는 나’가 자신의 전부 혹은 대부분일 것이라는 착각이 이러한 맹점을 만든다. 그래서 앞서 수십년의 성찰을 통해 자신을 잘 알게 되었다고 호언장담하던 명상가의 눈에는 자신을 냉담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전지전능하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맹점을 보려면 우선 전제되어야 하는 생각이 있다. 편견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신을 보는 눈에도 일종의 편견이 작용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갇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요청하는가? 혹은 그들의 말하지 않는 피드백에 의식적으로 귀 기울이는가?


내가 모르는 나를 상대방은 알고있다.



P는 얼마전 회의에서 후배 S에게 싫은 소리를 한 것이 맘에 걸렸다. 동료에게 자신의 행동에 관해 피드백을 요청하면서 “내가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인 것 같아. 그 날 회의에서 S가 좀 당황하지 않았을까?”라고 물었더니 회의에 참석했던 동료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이야. 그렇게 돌려서 말했는데 알아들었으면 다행이지.”그녀는 충분히 단호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제서야 후배가 같은 실수를 자꾸만 반복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그날의 피드백이 없었다면 P는 아직도 엉뚱한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것이다. 요즘 그녀는 ‘단호하고 솔직하게 의사 표현하기’를 연습 중이다. 


누구에게 피드백을 구해야 할까?




큰 실수를 하는 바람에 혼쭐이 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연스럽게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아주 드물다. 더구나 그것이 상대방의 이해관계와도 크게 상관이 없다면 흔쾌히 조언해 주겠다는 사람을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업무 스킬이라면 비용을 지불하고 코칭을 받거나 선임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인 행동에 관해 피드백을 받으려면 그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선의’가 필요하다. 하물며 선의에서 시작되었더라도 부정적인 피드백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에 상대방은 솔직하게 말하기를 망설이게 된다. 


디자이너 P는 최근 지인들과 함께 새로운 디자인 콘셉트에 관한 아이디어 회의에 참석했다. 누군가 용기 있게 발제자의 생각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뒤로는 처음 의견에 대한 더 길고 지루한 역 피드백이 이어졌다. 내내 잠자코 있던 P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안전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응. 좋은데? 


단순히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이렇게 보호 본능이 발동하는데 심지어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이 서로에게 편할 리 없다. 피드백은 요청, 제공, 수용의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 소모가 크다.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감수하면서까지 나의 성장을 돕고, 서로의 관계가 발전하도록 기꺼이 조언해 줄 대상을 찾는 데에는 한 가지 꼭 필요한 기술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피드백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다. 주변에서 나를 제일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한 명만 떠올려보라. 대개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나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지인을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지금 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당장 어떤 답이 돌아올 것 같은가? 제대로 된 피드백을 얻으려면 방금 한 질문의 대답으로 ‘엄지 척’이 바로 떠오르는 상대는 피하는 편이 좋다. 피드백을 구하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의 몰랐던 부분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나와 마주보는 두려움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가장 객관적으로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나 조언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는 가혹한 험담을 견디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날카롭게 단점을 찍어내는 피드백을 견디고 보니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이거나 매사에 부정적인 그 사람의 관점을 나에게 그대로 적용한 것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험담에서도 교훈을 찾는 강철멘탈의 소유자도 있지만 감정에 치우친 조언에서 개선점을 찾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멘탈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애초에 제대로 된 피드백을 구할만한 대상과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낫다. 단지 나를 할퀴는 비난에 맞서는 소모전이 되지 않도록 나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상대에게 피드백을 구하는 것이 좋다. 위의 두 가지 조건은 다음 장 <타인 인식의 사분면>에서 타인을 보는 ‘진정한 관점’으로도 설명된다. 여기서 적당한 피드백 상대를 결정하는 데는 오랜 교제 기간이나 최고 수준의 전문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서로의 성장을 지지하는 지속적인 관계라면 충분히 좋은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 실천을 함께 점검 할 수 있다면 따뜻한 동반자와 더불어 성장하는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조하리의 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