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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Jul 11. 2020

눈치주지 않아도 눈치는 보인다.

자신감과 자존감


맞은 사람은 있는데 때린 사람은 없다면 이보다 난감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런데 언뜻 비슷해 보이는 상황에서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도 눈치 보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다. 어째서일까? 


G는 되도록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줏대 없다는 소리를 듣는 일이 다반사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는 쉬워도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렵다. 가끔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더라도 남들이 혹시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너무 성급하게 꺼내는 말이거나 괜히 뒷북치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만다.



M은 고집스러울 만큼 자기주장이 확고해 보인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며 항상 ‘내 인생은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러다 누군가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남 얘기’로 일축하고는 곧바로 귀를 닫아버린다. 늘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말과 표정에서는 항상 예민함이 느껴진다.


M은 G에게 언제까지 남들 생각에 휘둘려 살 거냐고 큰소리를 친다. 둘은 형제다.



“사람들 본다.”

“남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니.”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형제는 항상 이런 말을 들으며 컸다. 혼자서 남자아이 둘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머니에게 사람들의 시선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아이들을 붙들어 매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형제는 동네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면 잠시 으쓱해지기도 했지만 그런 기분은 매번 그때 뿐이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동네 어귀를 돌아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밭도랑을 어슬렁거렸고, 어머니에게 크게 혼이 난 다음 날 아침에는 혹시 말소리가 새어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같이 등교하곤 했다. 어린 형제에게 동네 사람들의 ‘눈’은 항상 그들을 무섭게 지켜보는 매의 ‘눈’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평가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반응에 저절로 예민해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단서에 민감하다.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생존본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느끼는 순간 방어모드가 작동하여 관계는 저절로 위축된다. 저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다. 조심스러워서 먼저 다가가지 못하거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서 마음고생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칭찬받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에도 이번처럼 좋은 평가를 얻기위해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상대방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하면 관계가 어려워진다. 매 순간 자신을 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려운 상대와 편안한 관계를 기대하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때 손쉽게 자신감 카드를 꺼낸다. 자신감이 있으면 눈치 보지 않아도 될거라고 확신하며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신감을 키우는 방법’으로 흐른다. 하지만 평가받는 시선에 익숙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약점에서 생각이 멈춰 버린다. '어쩌다 내가 자신감을 잃게 되었을까?'  '이것만 조금 고치면 나도 남들 못지않지!'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들켜서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약한 부분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기고, 자신의 약점에만 몰두하는 아이러니를 겪게된다. 











장점 100가지를 나열해 보는 것도 결국엔 같은 이치다. 몇 가지 조건을 더 가졌다고 어디서나 당당해 지는 것은 아니다. 장점 100가지로 자신감을 얻은 사람은 단 하나의 단점으로도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자신감은 현재의 능력이나 조건을 통해서만 ‘증명’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타인의 시선을 택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면 그 원인은 부족한 자신에게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상대방은 그런 의도가 없었더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집착할 때, 상대방의 역할은 나를 평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관계로  이어지기에는 시작부터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를 붙들고 물어보라. 어째서 당신을 좋아하느냐고 말이다.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예쁘고, 능력 있고, 무엇보다 나를 끔찍이도 위해주지요.' 아무리 길게 보아도 10년 후쯤이면 사라져버릴, 지금에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들을 꽤 한참동안 나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의 장점이나 관계의 이유를 술술 나열하는 것이 진심의 밀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카사노바가 아무리 달콤한 말로 꾀어도 그 관계는 늘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다. 진심은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서 드러난다. 요리도 못하고 까탈스럽고, 가끔 엉뚱한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라는 말은 진심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감'이 조건부라면, '자존감'은 무조건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되는구나.' '괜찮구나.’를 직접 경험할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저쪽도 나처럼 나름의 사정이 있겠구나.’하고 상대를 돌아보는 여유도 생긴다. 그러면 '절대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억지로 상대방을 밀어내지 않아도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괜히 센 척하느라 눈치 볼 필요도 없다. 혼자서만 동떨어진 생각을 할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각자가 매 순간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한다. 심지어 같은 말을 할 때조차 속마음은  각양각색이다.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달라서 주눅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눈치보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정성들여 상대방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상대방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을 보게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갑자기 안쓰러워지거나 미안하고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은 더이상 나를 저울질하는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눈치를 봐야할 대상도 아니다. 타인은 나를 평가하는 존재라는 착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자신을 드러내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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