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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Mar 16. 2021

공감이란

생각나는대로, 그대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수줍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면 덩달아 가슴이 뛰고, 아이가 알사탕을 오물거리면 부모는 실제로 혀끝에서 달콤함을 느끼기도 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누군가 고통받는 것을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을 때 그것은 연민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감 능력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낄 수 있고 연민을 발휘하여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공감 능력을 타고났다. 우리 뇌에는 누군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마치 직접 경험한 것처럼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것을 ‘거울 뉴런 mirror neuron’이라고 부른다. 주삿바늘이 아이의 살갗을 찌르는 장면을 보면 몸이 움찔하는 반사작용이 일어나고, 동시에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겁이 나서 울음을 터트린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것과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마치 동시에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경우에 따라서 어느 한쪽이 과도하게 발달하거나 반대로 아주 둔감한 경우도 있다. 공감은 대개 타인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을 ‘조망 수용 perspective-taking’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반적인 공감 능력과 사회적 문제해결 능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Eisenberg, Murphy, Shepard, 1997)으로 알려져 있는데,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사람들은 ‘조망수용’ 능력이 뛰어나 사회적 관계 맺기에 능숙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친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상대방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상대방의 입장을 뻔히 알면서 그들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른다.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정서적 공감이 부족한 그들은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로 이어질 수가 없다. 심리학자 엘리 핀켈 Eli J. Finkel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는 능력이 손상되었다’고 표현했다. 정서적 교감이 없는 그들의 공감은 심리를 조작하는 기술에 불과하여 연민의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감정이 자신에게 전이되는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 정서적인 공감에는 오류가 개입할 여지가 많다.  추문에 휩싸인 모 영화감독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타지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을 때 누구도 겉으로 드러내어 애도하지 않았다. 천벌 받아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나서서 애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공감할 만한 것에 공감한다. 그런데 모든 판단에는 편견이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폴 블룸 Paul Bloom은 <공감의 배신>에서 이러한 정서적 공감의 한계를 지적했다.


유럽 축구팀 응원단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한 사람이 가벼운 전기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고, A그룹에는 같은 팀이라고 말하고 B그룹에는 반대편이라고 알려준 뒤, 두 관찰 집단의 뇌파를 측정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같은 팀이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관찰할 때는 몸이 움찔거리며 고통을 느끼는 뇌가 활성화된 반면 반대편이 고통을 당했을 때는 별 반응이 없거나 오히려 쾌락에 관여하는 뇌가 활성화되었다. 관찰자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이 공감에 개입한 것이다. 마음이 움직였다고 해서 그 기준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공감할 가치도 없다고 손쉽게 결론 내린 사건들이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깊이 공감하는 것일수록 한 발짝 떨어져서 다시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번 단락에서는 공감을 크게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으로 나누었지만 공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이것을 설명한다. 여기에 더해 동감, 동정, 연민, 감정이입 이제는 긍휼까지, 비슷한 개념들을 비교하며 이상적인 공감의 원리를 제시하기도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윤리학자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공감의 원리(the theory of sympathy)를 통해 도덕을 설명하는데, 원문에 쓰인 ‘sympathy’는 직역하면 '동정'에 가깝지만 ‘공감’으로 번역한다. 어쩌면 용어를 구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아무 조건 없이 함께 펑펑 울어주어야 할 때도 있고 휘청거리는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도 단호하게 말해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직접 나서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고 해서 연민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긍휼을 새로운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나와 함께인 그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고 떠오른 대로,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 그것이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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