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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Mar 18. 2021

에너지 뱀파이어를 떠나는 방법



사람들은 솔직하게 감정을 공유할 때 서로 가깝다고 느끼며 그 솔직함이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분별없는 감정은 오히려 관계에 독이 된다.



L은 불시에 전화를 걸어 대성통곡하는 선배 S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늘 자신만만해 보이는 선배가 힘들 때마다 자기를 떠올려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힘든일이 있거나 뭔가를 하소연할 때만 연락하는 선배에게 가끔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S는 그녀에게 늘 ‘고맙다’, ‘너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 자리에는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조언을 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선배는 더 비참한 사연으로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L은 선배의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치 20년 전, 수능이 끝나고 교실마다 공포 영화 ‘링’을 틀어놓았을 때 맨 앞자리에서 꼼짝없이 버텨야 했던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라 고민 상담을 해오는 지인들이 많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외근을 나왔다며 전화로 남자친구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근무 중이라 길게 통화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시간 날 때 연락 달라는 메신져 알람이 쉴 새 없이 깜빡거리는 바람에 L은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서자마자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친구는 퇴근하고 시간도 많으면서 왜 다시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다.


남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면서 누군가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면 그는 상대를 소위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브레네 브라운 Brene Brown은 그녀의 저서 <대담하게 맞서기>에서 상대방의 반응이나 피드백을 고려하지 않고 감정을 쏟아내는 것을 ‘감정 배설’이라고 표현했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지듯 막무가내로 표출된 감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퍼붓는 말과 행동은 폭력이다. 이때 감정 폭행의 가해자를 우리는 흔히 '에너지 뱀파이어'라고 부른다.




사진출처 : https://www.greenmountainenergy.com/2014/10/slaying-energy-vampires-home/


‘에너지 뱀파이어’는 상대방의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양 당당하게 요구한다. 취업 준비 중인 동기에게 직장생활 스트레스를 쏟아내는가 하면 모태솔로인 친구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대성통곡을 한다. 다음 날 걱정이 되어 다시 연락하면 대개는 묵묵부답이지만 프로필에 올라온 데이트 사진을 보면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단지 복받친 감정을 쏟아 낼 ‘감정 쓰레기통’이 필요할 뿐이어서 현실적인 조언에는 귀를 닫고 무조건 공감을 요구하기 일쑤다. 부정적인 감정은 전이가 빨라서 그들이 감정을 쏟아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짧은 순간에도 희생자는 금방 기운이 빠진다.


이런 상황을 눈치 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대화’이다. 꽉 막힌 상대라고 생각하면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통하는지 아닌지는 말을 해 봐야 알 수 있다. 상대가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먼저 이야기를 꺼내어 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만일 두 사람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진지하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것이고, 단지 감정을 쏟아 놓을 도구로 상대방을 이용한 것이라면 쓸모없어진 관계에 무심한 반응을 보이거나 반대로 관계 파탄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괜한 오해로 상대방을 단정 짓지 않기 위해서다. 단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에너지 뱀파이어’로 착각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지켜온 관계가 깨질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 쓸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상대방이 너무 힘든 나머지 미처 나를 배려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생길때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대가없이 받았던 위로를 떠올려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된다.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관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어떤 관계도 단절이 해답이 될 수는 없을뿐더러 어려운 관계일수록 복잡하게 연결되어있어서 쉽게 끊으려야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상대방과의 ‘정서적 거리 두기’가 도움이 된다. ‘에너지 뱀파이어’의 호소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절실함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정 소모가 커진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억지로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가 쏟아내는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흡수해버리면 그 관계는 얼마 못 가 무너진다. 사람은 스스로 변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서적인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지켜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주변의 인연을 정리하거나 관계를 버텨낼 방법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L이 주변 사람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도 그 근본은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담감을 느끼거나 상대방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관계에서 위축되기 시작하면 ‘에너지 뱀파이어’의 무리한 요구에도 쉽게 휘둘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어려운 인간관계가 가진 두 가지 반전은 '상대방은 나의 거울'이라는 것과 '나 역시 그럴수 있다'라는 가능성이다.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에너지 뱀파이어’가 되기 쉽다. 만일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일시적인 위안을 얻는 것에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 안의 ‘에너지 뱀파이어’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서는 힘든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럴수록 혼자 이겨내기로 단단히 마음 먹는 것이다. 변화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구든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관계 맺기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면 나와 내 주변의 ‘에너지 파이어’와는 영원히 작별하게 될 것이다.


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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