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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진 코치 Mar 19. 2021

그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걸까?

프라이버시에 관한 오해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해? 


어느 날엔가 남편이 내게 황당한 질문을 했다. 남편의 싱거운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어째 남편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뭐라도 캐물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지만 남편에 대해서라면 딱히 궁금할 것이 없었다. 나는 건망증이 심해서 잊어버리기 쉬운 비밀번호와 잠금패턴을 모두 남편과 같은 것으로 등록해 두었다. 휴대폰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일 그의 사생활이 궁금했다면 직접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 때 그가 나에게 하려던 말을 대략 짐작하게 되었지만 다시 캐묻지는 않았다.





‘안다’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표현은 아니지만 내가 그를 ‘안다’라고 말한것은 아내로서 ‘알건 안다’는 의미다.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것은 각자 비밀을 품고 지내거나 서로의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 주는 너그러움을 강요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부부는 모든 비밀번호를 공유하지만 방은 따로 쓴다. 노크는 필수다. 서로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이라면 조금 불편한 것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말하지 않는 사실은 다시 묻지 않는다. ‘알건 아는’ 상태지만 그렇다고 모든것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 기준은 약속으로 정한 것도 있고, 저절로 그렇게 된 것들도 있는데 기본 원칙은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이다. 


부부관계 전문가 존 가트만 John Gottman의 연구에 따르면 관계의 친밀도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가까운 관계일수록 암묵적인 규칙이 더 많다 norm of non disclosure, Gottman, 1979. 암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정도가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만일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말하라’고 추궁한다면 그것은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이때 상대방은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허물을 솔직하게 드러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목숨 걸고 프라이버시를 사수하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으름장을 놓으며 불신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이다.



출처 : https://hbr.org/2018/09/when-is-it-ok-to-tell-a-well-meaning-lie



거짓말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말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부러 숨긴 것이다. 거짓말을 판단하는 기준이 너무 높으면 그 사람의 주변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그 기준이 낮은 사람들은 대개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다. 그 거짓말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부러 어떤 사실을 숨겼더라도 오히려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선의의 거짓말인 경우도 있고, 반대로 무조건 정직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원칙을 세워놓고 자신의 사생활을 함부로 털어놓아 주변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무책임한 행동에 불과하다. 


프라이버시에 관한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는 비밀을 공유하면 무조건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개인차가 있는데, 앞서 ‘고립형 의사소통’에서 잠시 등장했던 ‘회피형 애착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친밀한 대상에게 프라이버시를 노출할 때에도 불편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Mikulince&Nachshon,1991. 그들에게 낯선 상대방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거나 개인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들은 친밀감 대신 불안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거짓말’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끔찍할 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관계의 초기에는 프라이버시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어진다. 그런데 이때 한쪽은 순식간에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거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고 사실을 숨기다 보면 괜한 오해가 쌓인다. 이것이 반복되어 서로에게 불편한 상태가 익숙해지면 타협점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프라이버시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마찰을 무릅쓰고서라도 관계 초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아무런 노력없이 시간만 흘러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암묵적 커뮤니케이션은 영영 통하지 않는다.  




혹시, ‘우리 사이에는 절대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라는 숨 막히는 원칙을 세워놓고 가까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지는 않은가? 가깝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현명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봐준다’는 달콤한 말로 캐묻고 상처받기보다는 가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아량을 발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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