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사라진 빈 들판, 바람의 울음만이 넘실대는 1월 초, 20여 년 만에 이곳 황룡사지를 다시 찾았다. 열대어 같던 퍼덕임으로 이곳을 누볐던 청춘의 무리 중 하나였던 그날의 나는 이제 낙엽마냥 팍팍한 일상의 얼굴을 하고 홀로 이곳에 서 있다. 작은 역사관 한 채와 복원 공사를 위해 둘러쳐진 초록색 철조망이 더해졌을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올라섰던 그날의 넓고 평평했던 거대 초석들의 도열은 철조망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빈 터 한 곳에 제각각의 모양으로 총총히 누운 스무여 개의 돌들만이 자신들이 한 때 무엇이었는지 바람에게 말하느라 숨가쁘게 왕왕거렸다.
바람을 따라 도착한 역사관 입구에는 깨진 기와 조각 묶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외세의 말발굽에 밟히고, 불에 그을리며 그 날의 아수라를 다 보았을 이들은 이 터에 묻힌 수백 년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경주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앉아 신라인과 고려인의 소망을 하늘과 이어주던 기와들은 이제 빈 벌판에서 불어오는 돌더미들이 전하는 바람의 소리에 응답하듯 웅웅거린다.
역사관 로비에 들어서자, 황룡사 구층 목탑의 모형이 높은 천정에 닿을 듯 솟아 있다. 1/10 크기로 압축된 모형 목탑은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으로 조명 아래서 유난히 반들거렸다. 복제의 숙명일까? 황룡의 승천을 닮은 원형을 담을 만한 천년의 깊이는 없었다. 카메라에 담아 보지만 내 가슴에는 차라리 벌판의 바람이 더 깊게 담긴다.
하지만 2층에 올라가니, 원형 크기 그대로 만든 치미와 부처 머리의 모형이 나를 벅차게 압도한다. 이 치미가 얹힌 황룡사와 불상이 놓였을 불전의 규모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치미와 불상을 만들며 염원했을 장인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대웅전 기둥을 깎던 목공의 바람, 목탑의 주춧돌을 갈던 석공의 바람, 목탑을 돌며 합장하던 신라인의 바람. 불타서 스러지는 목탑을 봐야 했던 고려인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목탑의 꼭대기인 9층 높이에서 내려다본 천년 수도 경주의 화려한 전경과 2층 높이에서 바라본 황량한 황룡사의 빈터를 차례로 보며 천년의 영광이 얼마나 덧없는지 말해주는 듯 쓸쓸하다.
세월에 풍화되어 알 수 없는 흔적을 새긴 비석들이 힘겹게 서서 무엇을 말하려는 듯, 떠나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먼 훗 날 다시 찾은 이 곳이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바뀌게 될까?
' 박물관 유리벽에 갇힌 기와 조각, 초석, 비석이고 싶지 않다. 목탑이 사라진 이 곳에 외롭지만 꿋꿋히 서서 그날을 증언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시절의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무엇으로 살았는지 바람으로 증언하는 이들의 바람이 진정으로 구현되는 모습으로 되살아나길.
그렇게 비석과 돌과 기와 조각은 멀어지는 나에게 자꾸만 왕왕거리며 바람을 불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