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겠지만 나의 업무는 상당히 과도하다. 거기다 집안일, 탁구레슨이 추가된다. 이러한 과도한 업무는 나를 나름 멀티 플레이어로 살게 했다. 대개 이런 식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면서 책상 위에 놓인 일기 검사를 한다. 오후엔 밀린 업무를 하며 학부모 전화 상담을 한다. 집에 와서도 다르지 않다. 수업 준비를 하며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동시에 세탁기도 돌린다. 텔레비전을 보며 원격 연수를 자막으로 보거나 요리를 하며 원격 연수를 볼륨 높여 듣는다. 뉴스를 보며 원격지원시스템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물론 매일같이 이렇지는 않지만, 대개 유사한 일상적 과로에 시달리는 편이다. 또 일주일 중 이틀은 퇴근 후 탁구레슨을 간다. 모든 교사가 이런 건 아닌데 내가 살짝 일중독 증세가 있는 데다 혁신학교 업무팀이라 그렇다. 그러다 보니 이제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으면 뭔가 허전해서 불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분 단위로 나눠 시간을 활용해야 뿌듯해지고 뭔가 낭비되는 시간이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이렇게 톱니바퀴처럼 바쁘지만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에 나름 만족하는 멀티플레이어 일중독자에게 강력한 태클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BTS의 컴백이다.
"오샘, 집에 가자. 오늘 방탄 컴백 무대 하는 날이야. 난 탁구도 못 가고 지금 바로 집에 간다."
나보다 1년 먼저 BTS 덕후가 되신 옆반 오선생님은 나의 격앙된 퇴근인사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나는 무뚝뚝한 편이다.)
"꺄르르~ 먼저 가세요. 난 아무래도 유튜브로 봐야 할 거 같아요"
항상 낮은 톤의 차분한 목소리로 빠르고 번잡한 목소리를 가진 나의 부러움을 사는 오선생님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높은 음의 웃음소리로 평소 나답지 않음을 재미있어 했다.
역시 1년 차 덕후인 오선생님은 BTS의 컴백에 동요되지 않았다. 그녀도 나처럼 혁신학교의 업무팀이라 항상 야근을 밥 먹듯 할 정도로 바쁘다. 그에 비해 덕후가 된 후 처음 맞이하는 BTS의 신곡 발표와 컴백에 일주일 내내 흥분상태인 나는 BTS의 컴백무대를 본방송으로 보기 위해 그들의 일정을 확인하며 하루 건너 칼퇴근하니 나날이 밀리는 업무와 빼먹는 탁구 레슨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있었다.
BTS가 컴백하기 전까지 나는 나의 덕질에 대체로 만족했다. 짬짬이 그들의 동영상을 찾아보고 그들의 예전 음악을 찾아 듣는 시간들은 나의 일상을 윤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나의 슈퍼스타가 컴백을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일상의 활력을 넘어서서 내 일상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지난 일요일, 미국의 유명 프로그램인 SNL에 BTS가 나온다는 소식에 나는 그것을 본방송으로 봐야 한다는 열망에 인터넷을 뒤져 본방송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결국 찾아냈다. 그렇게 겨우 찾아낸 사이트가 계속 다운되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열심히 사이트를 다시 열기를 반복하며 그들이 나오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 덕에 나의 오전 계획인 집안 청소와 원격 연수 듣기는 날아가 버렸다. 아울러 학교에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챙기고 급하게 차를 몰고 아들의 학교에 도착했다. 차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블루투스를 켜놓고 그들의 첫 번째 무대를 휴대폰으로 볼 수 있었다. 아들과 식당에 도착한 나는 급하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들은 점심도 먹지 않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휴대폰을 보는 나를 묘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며 밥을 먹었다. 드디어 방송이 끝나고 나는 아들 얼굴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보았다. 아들은 풋 웃었다. 나는 민망해서 이렇게 말했다.
" 아들, 나 다시 엄마로 돌아왔어."
" 음. 그런 것 같네. 얼른 밥 드세요."
여기까지 나의 덕후로서의 삶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그 다음 주였다. 그 주는 학부모 상담까지 겹쳐 업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정신없이 일을 쳐내기 위해 퇴근시간을 적어도 1~2시간은 연장해야만 했다. 하지만 국내 텔레비전 방송에 그들이 본격 컴백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목요일 첫 국내 방송 컴백무대를 보기 위해 오선생님을 뒤로하고 간 그날 나는 그들의 컴백 무대가 방송 제일 마지막 순서라 집에 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만난 오선생님은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 선생님 덕분에 나도 본방으로 볼 수 있었어요."
'일을 쌓아두고 칼퇴근을 한 나나, 일을 다 처리하고 여유롭게 집에 간 오선생님이나 모두 본방송을 볼 수 있었다니.. 나는 왜 이렇게 경솔한 것인가? 나도 일을 다 한 후에 집에 갔어야 했는데.'
다음날도 그들의 또 다른 방송이 잡혀 있었다. 이번에는 무려 오후 5시에 방송이 시작된다. 오선생님은 '무슨 방송을 그렇게 일찍 하냐' 며 투덜 되었지만, 일찍 퇴근하지는 않았다. 나도 어제처럼 일찍 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지만, 신경이 쓰여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라 탁구레슨을 갔다가 집에 가면 되겠다는 생각에 칼퇴근을 하였다. 탁구장 앞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다. 들어가서 레슨을 받다 보면 6시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어쩌면 BTS의 무대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집으로 방향을 틀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니 역시나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의 공연은 시작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냥 탁구 레슨을 받고 오거나 일을 좀 더 하고 올 걸 싶은 마음에 시간 활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스트레스에 탁자에 놓여있는 초코파이를 2개나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렇게 나의 일상은 업무의 미처리, 탁구 레슨 불참, 다이어트 실패로 무너지고 있었다.
덕후의 삶은 그동안 메마르고 팍팍했던 내 일상을 분명 활기차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일상을 조금씩 파먹으면서 내 생활을 흩트려 놓기도 했다. 그들이 계속 방송에 나오니 본방송으로 챙겨보는 게 너무 힘들고, 안 보자니 너무 보고 싶어 차라리 BTS가 빨리 외국에 공연하러 나갔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내게 때마침 한줄기 빛과 같은 덕질의 고수께서 나타나셨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BTS의 오래된 팬이었다. 나의 고민에 그녀는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BTS 때문에 일을 못 한다고? BTS보다 중요한 일이 있나? 일찍 가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고? 그 시간이 왜 아까워? 얼마나 행복하고 설레는 시간인데? BTS 일정 챙기는 게 힘들다고? 그들의 동영상을 보며 밤을 새우거나 식음을 전폐해 보지 않았다면 그 길이 힘들다 말하지 마라. BTS는 하나의 종교다."
그녀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아멘'을 외칠 뻔하였다. 그렇게 그녀의 멋진 어록들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그녀에게 건네며 헤어지려는데,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로 한마디 했다.
"고마우면 공연이나 팬사인회 티켓 좀 구해봐. 같이 가자."
나는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그런데 가는 게 부끄럽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 나를 좋아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저를 좋아해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당당해지라구. "
그녀에게서 여유로운 덕후 고수의 향기가 났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나의 스케쥴따위는 제쳐두고 새벽까지 당당하게 나의 슈퍼스타의 동영상을 보곤 한다. 아주 가끔.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믿습니까?"
나는 조용히 읊조린다.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