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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May 19. 2019

스승의 날에 보내는 25년 만의 답장

  얘들아.  지내지?

 렇게 25년 만에 너희들에게 부치지 못하는 답장을 쓴다.

 25년 전 너희들에게 받았던 많은 편지가 지금 내게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을 잊은 것은 절대 아니야. ( 그 후 몇 년 뒤부터 아이들의 편지를 모으기 시작해 지금 2박스 정도가 있지만 정작 교직 초기 아이들의 편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구나.) 어쩔 때는 13살 먹은 너희들보다 더 철없었던 그 당시의 나는 너희보다 겨우 10살 남짓 더 먹은 신임 교사에 불과했었단다.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허세 가득했던 그때의 내 모습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기만 해.  25년 전 5월 15일은 너희들의 각종 이벤트로 정신없는 하루였지.  아침에 교실문을 열면 교실 지우개가 출입문 위에서 떨어졌고, 너희들의 깔깔거림과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어.  칠판에는 스승의 날 축하를 가장한 낙서가 한가득이었고 교실 곳곳엔 풍선이 굴러다녔지.  교탁에는 초코파이로 만든 케이크와 편지가 쌓여 있었.  너희들이  며칠 동안 세웠을 비밀 작전과 새벽에 등교해서 꾸몄을 일들을 생각하 나는 웃으며 받아줄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축하는 너희들의 계획대로 1교시 수업 땡땡이로 이어졌고 어떻게든 2교시부터 수업을 시작하려고 분위기를 수습하다 결국 운동장에 나가 같이 축구 한 판을 하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지. 그때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  


  너희들과의 아쉬운 졸업을 앞두고 우리 반끼리 비밀 여행을 갔었던 것 기억하니? 기차를 타고 도착한 경주 시내를 돌아다녔던 추운 1월의 그 어느 날.  그리고 중학교 졸업 까지 매년 스승의 날만 되면 너희는 거의 모두 함께 찾아왔었고, 우리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했고 여자 아이들은 응원을 했지.

  운동신경도 없는 나는 굳이 너희들 속에서 같이 뛰기를 원했고, 너희들은 성가신 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가끔 공도 패스해 주었지.  3년 후 나는 멀리 전근을 갔고, 너희들도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  몇 년 후 내 결혼 소식에 다 같이 몰려와서 기타 치며 축가를 불러주었고 내 신혼집에도 찾아와 함께 밥을 먹었지.  그 후 너희들이 대학을 가고, 군대에 가서 간혹 연락이나 편지가 왔었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구나.  지금처럼 휴대폰이나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탓일까?  아쉬움은 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가끔 너희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 말이야.  첫사랑이 그런 것처럼 처음이 주는 설렘 때문일까?  나의 첫 아이들인 너희들은 그렇게 나의 추억이 되어 가슴 깊이 남아버렸어.


 이젠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첫사랑 같은 너희들이 너무 강렬하게 기억되는 탓일까?  아니면 나의 철없음이 사라져 버린 탓일까? 지금 나의 삶은 아주 미지근하단다.  더 이상 아이들과 축구를 하지도, 함께 여행을 떠나지도 않아. 물론 졸업한 아이들이 스승의 날이 되었다고 몇 년째 몰려오지도 않아. 가끔 졸업생이 찾아올 때도 있지만 너희들만큼의 살가움이 생기지 않는 것은 나이 탓일까?  가끔 당 못할 아이의 행동이나 학부모의 요구에 우울해하며 내 일에 회의를 느끼기도 해.  그게 그 시절 행복한 줄 몰랐던 행복했던 그 교사는 미지근한 일상을 담담히 살고 있어.  해도 스승의 날이 돌아왔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나는 보내고 싶었고 그렇게 보내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몇몇 아이들이 쑥스럽게 내미는 편지를 감정 없이 받았다는 것 정도였어.  분명 스스로 쓴 것이 아닌 올해 담임교사로부터 주어진 숙제처럼 의무적으로 써 온 것이리라 짐작했으니까.  나는 편지를 받은 지 사흘만인 오늘 아침에야 편지들을 열어 보았어.  (목요일은 체험학습으로 바빴고, 어제 금요일은 몇몇 아이들이 하루 종일 싸우고, 수업 진행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나는 늘 새벽까지 밤을 꼬박 새우며 bts의 영상과 노래로 위안을 받야만 했.) 십여 개의 편지 속에는 예상대로 형식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기대하지 않은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쓰인 편지도 많아 나를 위로해 주었.  밤새 bts의 음악 들은 것보다 오히려 나았.  (미안해. bts오빠들.)  특히 현우,  요 며칠 반항적인 말투로 계속 지적을 던 아이에게 받은 편지.  나는 나에게 편지를 쓰지 말고 작년 선생님께 편지를 쓰라는 숙제를 우리 반 아이들에게 내주었는데 우리 반 현우는 내 편지를 써온 거야.  색종이 꽃까지 접어서 붙였고  내용도 길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보며 멋진 선생님이 되려는 꿈이 생겼다'는 놀라운 내용이 쓰여 있었어.  현우의 꿈은 축구선수어.  축구를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거든.  하루 종일 축구 이야기만 하고 축구공을 쉬는 시간에 놓지 않는 아이가  때문에 선생님이 되는 꿈이 생겼다고 하는 거야.  또 재작년 가르쳤던 한 아이가 교사가 써라고 준 편지지가 아닌 연습장 같은 종이 한 장 가득 깨알같이 써 온 편지 내용도 나의 마음을 많이 위로해 주었.  둘 다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 미지근한 교사였던 나를 향해  자신의 변화를 '선생님 덕'이라고 써 놓은 거지.  아이들의 편지 속에 런 표현 흔하긴 하지만 왠지 이 두 아이의 편지에서는 진심이 느껴졌어.  


  세상은 변했. 이제 많은 아이들은 교사에게 뭔가를 배운다는 기대 하지 않.  그저 교사를 통해 아는 걸 확인하려 할 뿐.  그 속에서 정말 몰라서 배움이 절실한 아이들은 기가 죽어 있어.  그 기죽은 아이들을 찾아내 살피는 게 현재 내 중요한 일이 되었어.  배움은 인터넷, 특히 유튜브가 더 재밌고 잘 가르쳐 주니까 어쩌면 유튜브가 스승인 셈이야.  이제 학교는 또 다른 감옥, 교사는 교도관에 가까울지 모른다면 내가 너무 냉소적인 걸까?


  며칠 전 아는 선생님을 만났.  같은 부산이지만 환경이 좋지 않은 동네에 있는 작은 학교에 근무는데 요즘 교사할 맛이 난다고 하는 거야.   이 학교 아이들과 만나면서 진짜 교사가 된 것 같다고.  몸에서 조금 냄새가 나고 심지어 머리에 이가 발견되는 아이도 있지만,  아이들은 교사를 해맑게 쳐다본다고.  교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고 무겁게 느껴진다고.  나는 내년에 학교를 옮.  항상 아파트 단지의 대규모 학교를 돌며 영혼이 소진되는 느낌을 받던 나 귀가 솔깃해졌어.  작은 이 학교에 가서 25년 전 땀 내음 풍기며 함께 축구하던 너희들과 같은 추억을 다시 재연할 수 있을까?  이제는 속세의 때가 잔뜩 묻은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꿈일까?


  지금은 스승이 아닌 멘토의 시대이지.  스승이란 말은 문어체로만 쓰여.  구어체로서의 스승은 그 기능을 다한 것 같아. 이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과 재능을 전수해줄 멘토를 선택하는 시대이지.  교사도 우연히 운명처럼 만나는 것이 아닌 쇼핑 목록처럼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에서 골라 신청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선생(먼저 태어난 자)이란 용어의 의미도 이제 후생들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 권위를 부여받지 못하기 때문에 멘토가 더 맞는 듯해.  과거의 오랜 경험이 현재나 미래에 가치 있는 정보를 줄 확률이 이제 많지 않아졌거든.  쩌면 너희들이 그리고 편지를 쓴 그 두 아이가 오히려 나의 스승인지 몰라.  어린 너희들이 미지근한 나를 일깨우고 좌절하는 나를 위로해 주며 한 걸음씩 옮기게 해 준 것이니까. 그렇게 부끄럽고 작은 나를 다독여 25년을 끌고 왔으니까.

 

 이제 30대 후반이 되었을 너희들이 어떻게 변했을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기도 해. 그래서 너희들을 어느 날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철없던 그때의 나를 따라주고 좋아해줬던 거니?  나의 이런저런 요구들을 왜 귀찮아하지 않고 함께 공감해 주었던 거니?"


너희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어.

" 그냥 그 시간이 좋았어요.  아이 같았던 선생님이 한없이 편하고 친구 같았어요. 우리의 장난에 잘 속아 넘어가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 그때의 우리 급훈을 외치고 싶어.  기억나니? 매일 외쳤던 우리 반 급훈? 희들이 졸업 후 찾아온 첫 스승의 날에도 우리 반 애들 수업을 마치며 급훈을 외칠 때 너희들이 창밖에 서서 함께 외쳤던 바로 그 급훈.  지금 나는  뒷부분 내용을 잊어버렸지만. 너희들이 기억난다면 끝까지 함께 외쳐줬으면 해.


"한 자루의 촛불처럼, 한 그루의 나무처럼 베풀고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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