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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Jun 08. 2019

버스의 추억, 그 아련함

     어릴 때 나는 버스를 타는 게 정말 싫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어린 나는 버스만 오르면 버스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찌든 기름 냄새로 내 콧속 후각부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울렁거림은 머릿속을 헤집은 다음 천천히 내려와 내 가슴을 조여왔다.  그렇게 시작된 멀미는 버스를 탄지 40분쯤 되면 결국 버스를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나는 중고등학교 6년을 집 근처 학교를 굳이 두고 멀리 있는 학교 배정받는 불운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나와 띠 동갑인 58년 개띠로 대변되는 베이비부머들의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버스로 등하교를 함께 면서  세계 3위라는 엄청난 인구밀도를 자랑하던 우리나라의 실상을 온전히 체감 수 있었다.   정류장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터져나갈 듯한 버스 안으로 끝도 없이 꾸역꾸역 잘도 들어갔다.  그것은 타인 간의 기본 거리를 무시한 인정사정없는 밀착으로 가능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때 버스 안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의 사람들로부터 눌림을 당한 상태로 강제로 세워져 있는 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호흡으로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높은 농도와 온갖 체취 속에서 나는 마치 물밖으로 던져진 금붕어마냥 입을 위쪽으로 향한 채 헐떡거리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야간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막차 시간에 맞추어 버스를 타고 캄캄한 밤을 달려 멀고 먼 집으로 돌아오기를 3년 동안 시계추처럼 반복하였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달리 감사하게도 항상 자리가 있었고, 나는 적당한 뒷자리에 고꾸라지듯 앉아서 영어단어집을 꺼내 몇 단어 외우다 보면 고개를 창문에 처박고는 잠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대부분은 몇 정거장을 남겨두고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뜨여 내가 내릴 곳에 무사히 내렸으나,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내릴 정류장을 지나서 정신이 들어 결국 한, 두 정거장 지나서 버스에서 내리는 일이 생겼다.  그러면 11시가 넘은 시간에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컴컴한 밤의 얼굴 마주 보며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버스의 추억 중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임신했을 때의 지옥의 출근길이었다.  집에서 직장까지 가는 버스노선은 그 당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터널에 속했던 구덕터널을 지나는 코스였다.  입덧이 심했던 그 여름 장마철에  구덕터널 주변의 교통체증은 극에 달했고,  터널 한가운데에서 감금당한 채 나는 온갖 냄새 울렁거리는 속을 다독이며 버스 손잡이를 움켜잡은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리던 내 팔에 온 몸의 무게를 기대고 바깥공기를 열망하며 버틸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버스 탈 일이 거의 없는 자가용 운전자가 되었다.   내 몸이 가장 원하는 쾌적한 온도 내가 사랑하는 음악으로 가득 채운 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흥이 내키는 대로 흥얼거리는 나만의 아지트, 나만의 낙원인 나의 차를 갖게 된 것이다. 그곳은 멀미도 나지 않았고, 퀴퀴한 체취에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었다.  터널에 갇혀 한 팔로 내 삶의 무게를 버텨서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버스의 아픈 추억을 잊고 살아온 어느 날, 나는 아주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그 버스는 세월만큼이나 무색하게 적당한 온도, 적당한 인구밀도로 상쾌하고 쾌적했다.  주말의 이른 오후였기 때문일까? 시간의 여유가 있는 저녁 약속이었기 때문일까?  적당한 버스 좌석을 선택해서 앉은 나는 여유롭게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스쳐가는 길가의 풍경은 낮은 승용차 운전석에서 조심스레 운전하며 스쳐보았던 것과는 달리 서정적이고 경쾌하였다.   먼 목적지인 광안리 버스는 나의 추억을 함께 실어날라주며 나를 친절하고 편안하게 데려다주었다.  승용차를 탔다면 목적지까지 주변 차량의 차선 변경을 신경 쓰며 낯선 경로에 길을 잘못 들까 전전긍긍하며 갔을 곳인데 말이다.  또 나는 버스를 탄 덕분에  큰 도로에서 내린 후 광안리 해변까지 무려 15분 정도를 걸어가게 되었다.  6월 초는 초여름이라 국제적 관광지인 광안리 입구까지 이어진  많사람들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걷는 기분 름 위를 걷는 듯 했다.  푸른 하늘을 닮은 푸른 바다와 멀리 펼쳐진 광안대교가 보였고  길 따라 도열한 화려한 카페들, 무엇보다 사람들의 가벼운 웃음과 소리들이 바로 옆에서 음악처럼 들렸다.  바닷가 입구에서는 버스킹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대에서 물건을 파는 소리가 나를 가볍게 흥분시켰다. 나는 실로  년 만에 혼자서 이 길을 뚜벅뚜벅 걸어서 해변까지 내려온 것이다.  모든 추억이 그렇지만 예전 버스의 아픈 기억은 또 이렇게 행복한 억으로  것인가? 그 시절 조그만 변두리 해변이었던 광안리 모래밭에서 통기타를 치며 생목으로 노래 부르던 가난한 학생들은 사라지고, 화려한 야외 장식물 앞에서 전자음악에 맞추어 세련되게 노래하는 버스커들과 각종 이벤트를 둘러보는 화려한 관광객들로 가득한 오색창연 광안리는 그 시절 버스를 타고 멀미를 해 대며 창문에 머리를 박고 졸던 풋내 나던 소녀와 오랜만에 승용차를 놓고 버스를 탄 추억에 잠긴 여유로운 중년의 여자의 대비와 닮은 모습이다.



   저녁이 되자 광안대교는 화려한 불을 밝혔다.  야외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속에 우리도 앉았다. 여기는 우리가 사는 부산이 아니라 이국적인 어떤 곳의 해안가로 변신하였다.  버스커는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는지 둘러싼 인파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의 돌아오는 길을 이끈 것은 버스가 아니었다.  그렇게 또다시 승용차를 며 돌아오는 길은 몇 시간 왔던 길과 풍경이 사뭇 달랐다  버스가 올망졸망한 시내를 통과해 왔던 것과 달리 승용차는 광안대교, 부산항대교, 남항대교, 천마산터널, 을숙도 대교로 이어지는 부산의 동서를 관통하는 최적, 최단의 환상적 도로를 빠르게 통과다. 아마 버스로 꼬꼬불 둘러 왔다면 몸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때처럼 행복했을까?  순간행복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의 시간은 정말 행복한 것이겠지?  시절 소녀는 승용차 유리창에 비친 중년의 여자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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