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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Sep 15. 2019

통속성, 그 가벼움의 위대함

부산 현대미술관을 다녀와서

 1년 전 집 근처 미술관이 생기면서 문화와 담쌓고 살던 나에게 문명의 햇살이 비추었다. 그래 봤자 겨우 두 번 다녀왔지만 그 두 번의 관람을 통해 빈약하나마 현대 미술의 추세를 조금 느껴보았다.   이름이 현대미술관이라 그런 건지 그 두 번의 전시 주제가 그러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껏 내가 알던 미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내가 아는 미술이라 함은 시각적이고 고정화된 작품, 예를 들면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회화나 단단한 재질로 구체적 형태를 갖춘 조각, 그것도 아니면 디자인적인 미적 표현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내가 둘러본 미술관에서는 이런 작품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미디어를 매개로 하는 모니터 영상이나 음향이 많았다. 커다란 화면 속에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움직임, 그리고 그 속에서 들리는 단조로운 음향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대체로 현대 문명의 문제, 인간소외의 문제를 다루었다. 예를 들면, 영상 속 사람들이 공을 손에 글러브처럼 끼고 복싱하듯이 알 수 없는 게임을 한다거나 어떤 남성이 케이블선을 끊임없이 풀면서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영상,  또는 우주 로켓이 발사되는 장면우주 어느 행성의 모습 등이었다.  모니터 영상이 아닌 경우는 일정한 리듬의 움직임을 가진 촘촘히 박힌 막대들의 행렬 정도였다.  


  이것들이 미술 작품이 맞기나 한 건지 전위예술인지, 아니면 다큐 영화인지 도통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느끼고 가야 한다는 한 미술 문외한의 강박관념으로 작품 옆 벽에 붙여진 작품보다 아크릴 판에 깨알같이 쓰인 긴 설명을 읽고 또 읽어도 작품만큼 난해한 설명에 또 한 번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열심히 해설을 읽고 보니 일부 주제는 설명과 작품의 관계가 이해되기도 했다.  매일 마주하던 현상이나 모르고 지나쳤던 일상에 대한 색다르고 낯선 접근은 신선한 환기 효과로 내면의 잔잔한 일렁임 또는 삶의 씁쓸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가슴을 관통하는 뭔가를 던져주지는 못했다.  이처럼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은 예술의 세계에 나는 난감해하면서도 한편 나의 통속적인 감성 수준을 나무라며 그렇게 두 번의 현대미술관 관람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미술의 다양한 시도와 확장은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처럼 앞서가는 미래지향적인 예술 작품이 일반 대중과 유리되어 떠도는 문제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출처: 부산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이렇듯 나는 예술을 모르는 통속적인 감성의 소유자이다.  [통속성]이라 함은 한편 '속되다'와 같이 부정적인 어감이 있지만 사실은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는, 소시민의 보편적 정서를 관통하는 감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통속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명한 이 시는 나처럼 평소에 시를 즐기지 않는 사람조차도 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통 일면식만으로 강렬하게 기억되어 있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첫 행 그리고 이 한 연 모든 나의 감각을 관통한다. 나의 감성이 이해한다.  이 절묘한 통속적 감나를 릿하게 만다.  시적 은유와 상징 따위를 엎고 야수 같은 을 건드리는 강렬하고 직설적인 언어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광복의 꿈과 이상향을 순수하고 정결한 언어로 노래한 윤동주의 문학적 향기나 수사적 상징과 은유로 숭고하고 위대하게 노래한 이육사의 주제의식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은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다. 이상의 암호 같은 읊조림의 시도 묘한 끌림으로 가슴 언저리를 맴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이 한마디처럼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거나, 시어들이 가슴속을 휘감지는 않는다. 그리고 따뜻한 봄의 햇살을 뜨거운 화살처럼 받아내며 슬프도록 온통 푸르른 세상을 휘청거리며 걷는 한 식민지 지식인의 모습이 등장하는 이 한 연, 이 한 장면이면 모든 게 끝난다. 통속적 드라마 속 퇴폐적 주인공의 눈빛처럼 통속적으로 나의 뇌리에, 가슴에 쾅 박힌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가벼움의 힘. 통속성의 미학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것은 쩌면 노벨문학상 수준의 심오한 미사여구가 아닌 소시민의 마음 한 구석을 대변하는 통속적 이야기 한 자락, 노래 한 구절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작위적인 통속성은 그 의도가 뻔히 보이며 직설적 감정의 배설구 같아 여운의 매력이 없다.  그건 과도한 예술성과 무거운 상징성보다 오히려 난감하다.  말이 뻔한 상업 영화와 작가 고민이 없는 세태 소설, 유행어를 모아 놓은 노랫말 가사는 때로 통속성을 넘어 유치함과 식상함으로 귀결된다. 근엄한 조선의 철학적 고전들을 넘어서 빛나는 생명력으로 조선 후기의 시대적 감성을 이끌었던 춘향전, 홍길동전은 통속적이나 그런 의미에서 예술성의 힘을 잃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책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이었다. 고상한 예술성을 거부했지만 작가적, 시대적 진실을 마주했던 통속적 서사였다.    

  

  그래서 내가 본 미술관의 작품들처럼 매체를 이용하여 이중, 삼중의 상징으로 낯설게 바라보는 관조적 예술의 매력은근 끌리긴 하나 뭔가 심심하다. 로는 날 것으로 외치는 유화물감 듬뿍 발린 적나라게 꿈틀거리는 회화 작품이 그립다.


  이처럼  단순하며 통속적 인간이므로  음악 또한 나른하고 고상한 클래식나 재즈 음악보다 비속어 휘날리는 방탄소년단 슈가의 강렬한 랩이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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