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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27. 2019

행복과 허무 사이에 존재하는 덕질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다녀와서

  긴 화장실 줄을 서느라 공연 시간에 임박하여 공연장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무대와 가득 찬 관중에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눈물이 움찔 났던 것 같다.  비록 눈 앞이 아닌 멀리서 형체만으로 보는 콘서트지만 모든 건 완벽했다.  오늘 목이 다 쉬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지난주에 걸 감기를 낫게 하고자 아무리 아파도 병원 따위는 안 가는 지난주 병원에 가서 약을 타서 꼬박꼬박 챙겨 먹고 좋은 컨디션으로 출발했다.  렇게 그들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간다는 3층 관람자로서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렇게 한 마리의 반딧불이처럼 멀리서 반짝이는 작은 응원봉 불빛이 되어 그들에게 나를 열심히 보여주었다.  비록 나는 그들을 화면으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렇게 짧은 1박 2일의 여정을 마치고 오늘 아침 비행기로 돌아온 나는 남편이 차려준 밥 한 덩이(본인이 사 먹고 남은 도시락)를 먹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행복인 듯 허무인 듯 알 수 없는 그 뭔가가 밥알과 함께 내 입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울듯 말듯한 기분으로 밥을 꾸역꾸역 먹고 달콤한 허무함에 빠져 이렇게 이 글을 쓴다.


  내가 왜 그렇게 울컥했던가 이 글을 쓰다 문득 깨달았다.  또 이들을 내가 현장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겁이 덜컥 난 것이다.  내년에 혹시나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완전체로 공연을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심지어 해체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내 속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계속 계속 보고 싶은 모습을 어느 날 못 보게 될까 겁을 내는 나의 모습에 또 겁이 나기도 했다.  


 지인이 말했다.

" ㅇㅇ씨가 하도 좋다길래 나도 열심히 음악 들어보고 유튜브도 봤는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순간 내 지식과 말주변이 BTS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나의 무지함에 대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뭔가에 끌린다는 것.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속된 말로, 좋은데 이유가 어디 있나?


 혹자는 말할 것이다. 가수라면 가창력이라던가, 노래가 좋다나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가창력이라면 모두가 조수미의 팬이 되어야 한다.  노래가 좋다는 것은 각자의 경험과 삶과 가치관과 연결된 문제이다.  결국 각자의 삶의 궤적과 감정의 공명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좋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이끌리는 대로 느끼는 것이지.  강요할 수도 강요받을 필요도 없.  논리적으로 목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일이 되어버리는 것. 그 자꾸 고 싶고 끌리는 것이 이유이다.


  취미가 일이 되 즐거울까? 다른 일 보다야 즐거울 테지만 그렇지 않을 것 다.  결국 일은 일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양반들이 선교사들이 야구 경기하는 모습을 처음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그리 힘든 것을 왜 하인들을 안 시키시오."

 좋아하면 숨차고 땀나는 일이 즐거움의 기폭제지만, 일이 되는 순간 노동이 된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서 눈을 가린 어린 장금에게 음식 재료를 맞추라 해서 홍시라 맞추자  '왜 홍시냐'고 물으니 '홍시맛이 나니 홍시라는 것인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냐'라고 한 것처럼 '좋으니까 좋은 거지 왜 좋으냐고 물으시냐'라고 말하고 싶다.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 그래, 요즘 나이 든 아줌마들 마음 붙일 때가 없어서 그렇게 아이돌을 좋아한대. "

  순간 내 행복과 덕질이 하급 감정으로 분류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랬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 글은 그동안 내가 덕후들을 바라본 비하적 시선에 대한 작은 반성문일 수도 있다. 나의 10대 시절에도 내 주변에는  빠순이로 불리는 덕후들이 있었다.  교실 한쪽에서 그들이 나누는 가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소로운 코웃음을 쳤었다.  '할 일 없는 것들' 정도의 마음이었다.  나의 20대 때도 친한 친구가 이선희의 광팬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끌려 이선희의 미니 콘서트에 따라갔었다.  그곳의 광란(?)에 가까운 열광을 보고 무슨 광신도를 보는 것 같은 불편함에 인상 쓰며 나왔었다.  나의 30,40대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이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 하면 한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던 기억도 다.  


   뭔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이, 행복의 질에도 꼭 수준이 있을까?  있다면 가장 순수한 감정에 가장 뜨거운 이 열정의 행복이 저급일 이유가 없다.  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으며, 이타적인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물론 문제 있는 일부 팬들의 처사는 예외로 한다.)


  하지만 가끔 빠지는 허무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이 행복에 대한 작은 댓가이다.  나 스스로를 잃지 않으면서 행복한 덕질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는다면 이런 허무는 감당할 수 있다.  행복에 어떤 목적과 이유를 더해버리면 어쩌면 그것은 일이나 수단과 같은 행복일 것이다. 아니 행복을 가장한 일, 욕망이 될 것이다. 고로 나는 순수하게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나의 이런 갑작스러운 덕질을 당황하지 않고 응원해 주는 나의 남편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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