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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25. 2018

인간 소외에서 자연 소외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사회

 엄마는 육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선이나 달걀, 해산물은 즐겨 먹지만, 가축을 도축하여 나온 식재료는 전혀 먹지 않는다. 그래서 라면도 먹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말하길, 어릴 때 가축을 잡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어릴 때 눈 앞에서 뛰어놀던  닭, 송아지가 어느 날 음식이 되어 나왔을 때의 충격으로 다시는 육식을 하지 않게 되었단다.

  하루 세끼 중 한 끼 정도 외식을 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점심, 저녁 두 끼를 외식으로 해결했다. 그런데 두 끼 모두 자판기 같은 기계 앞에서 메뉴를 선택하고 카드를 넣고 아래 배출구로 나온 메뉴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주방으로 가서 건네주는 방식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 번호가 전광판에 뜨면 다시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가져와 먹었다. 나는 가게 주인과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고 먹고 나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상당히 당황스러웠던 음식 주문 자동판매기

  옛날에는 밭에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채소를 거두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시골마을이 아니라도 마을 공터에는 항상 깻잎이 자라고, 고추가 자라고, 옥수수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트에 가면 흙 한  묻지 않고 깔끔하게 포장된 채소들이  반짝거리며 진열되어 있고, 생선은 통조림통에 반조리되어 밀봉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 어디에도 이것들이 논과 밭, 바다에서 난 자연의 일부였다는 생각할 틈이 없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 [인간 소외]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기계 문명의 시대가 오면서 사회 조직, 산업 조직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도 그 조직의 한 부속품처럼 여겨지고 각각의 개성은 매몰되어버린다는 것을 우려한 의미로 쓰였다. 이제, [인간 소외]란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인간 소외]를 넘어서 [자연 소외]의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연의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이  생명의 원천이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생각할 여지가 없는 공간 속에 산다. 모든 동식물들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생산, 가공되어 상품으로만 주어진다.  상품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도 아니고, 자연의 산물도 아니다.  사람들은 것이 자랐을 흙냄새, 본래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 농부의 땀에 감사할 필요도, 자연의 고마움을 되새길 필요도 없어졌다. 엄마처럼 고기를 볼 때마다 그 생명의 의미가 부담스러워 주춤거리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그렇게 인간의 삶 속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고, 그런 생산품을 먹고 사는 인간 또한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니게 되었다..


사람의 가치도 변해버렸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영속된 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조직 속 기능이나 역할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인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무인 학교, 무인 회사를 다니며, 무인 자동차를 타며 번쩍거리는 기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말 한마디 안 하고 하루를 보내는 삶을 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한 때 소중한 생명의 일부였음을 완전히 잊고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의 몸도 조금씩 조금씩 기계로 대체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의 그 어느 날, 우리는 자연이라는 낱말을 아예 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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