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살던 집 근처를 우연히 지나게 되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할 때 가장 마음이 쓰였던 것이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까지의 거리였다. 또래에 비해 유난히 작고, 걷는 것도 엉성한 아이가 이 긴 길을 걸어서 횡단보도를 2개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학교까지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당시 우리 아이를 얼마나 걱정 투성이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 새삼 느껴지면서 그때의 내 마음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 짠해졌다. 나의 이런 걱정투성이 마음은 그 후로도 계속되어, 몇 년 후 조금 더 멀어진 곳에 위치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니 또 걱정이 시작되었다. 등교시간에 맞춰 항상 빠듯하게 집을 나서는 아이가 그 먼 거리까지 헐레벌떡 뛰어갈 생각을 하니 내 마음도 함께 숨이 가빠졌다. 그런데 그 또한 지금 생각해 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학생들에 비하면 그렇게 힘든 등굣길이 아니었다. 이렇게 남들보다 별나게 걱정 많은 내 성향이 아이를 유약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대학을 가게 되면 나는 이런저런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걱정쟁이 엄마는 변함이 없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아이가 그만 학교 기숙사 배정에서 탈락하였다.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지난 주말 서둘러 아이의 하숙방을 알아보러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한 번도 하숙이나 자취를 해 보지 않은 나는 그저 드라마를 통해 본 전형화된 하숙의 모습을 기대하고 올라갔다. 대략 이렇게 상상하였다.
학교의 뒷골목 어디쯤에 붉은 벽돌담이 둘러진 아담한 2층 주택. 그리고 그 담벼락은 아기자기한 담쟁이덩굴이 운치 있게 감싸고 약간은 낡아 보이는 초록 철제 대문이 보인다. 그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자그마한 마당과 반투명의 두꺼운 유리로 된 현관문이 있다. 그 현관문을 열면 반질반질한 마룻바닥이 보이고 그 가운데 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커다란 좌탁이 놓인 거실이 있다. 그 거실을 중심으로 위아래 층을 합쳐 대여섯 개의 방이 있고 각 방에 학생들이 하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방에 주인이 산다.
이 정도의 낭만적인 하숙집을 상상하던 나는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첫 하숙집부터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현실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회색 시멘트 담벼락에 난 작은 창문에 대충 붙여진 붉은 글씨의 하숙이란 표지가 스산한 4층짜리 낡은 빌라였다. 주인의 안내로 들어선 1층에는 아무것도 없어 썰렁해 보이는 주방에 둥그런 식탁 2개와 10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은 가파르고 좁았다. 2층에 올라가니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복도를 따라 양쪽에 각각 5개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방문을 열자 엉성한 철제 침대와 허물어질 듯 겨우 서 있는 책상 한 개만으로 꽉 차 보이는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단 입구에는 10명의 학생들이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었다. 바깥의 냉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그곳에는 변기 2개와 샤워기가 붙어 있는 세면대가 하나 있었다. 너무나 친절한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나의 어두운 표정을 들킬까 미안하여 인사를 꾸벅하며 허둥지둥 나왔다.
그리고 찾아간 두 번째 집은 가파른 경사 언덕 위 좁은 면적에 세워져 있어 5층 건물이 마치 10층 정도 건물처럼 높다랗게 보였다. 그곳 또한 층층마다 들어찬 벌집 같은 방과 입구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신발들이 마치 난민 수용소를 연상시켰다. 예전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수수하지만 따뜻해 보이는 그런 하숙집을 2020년 서울 하늘 아래서 찾는 내가 잘못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이 말로만 듣던 서울의 주거 빈곤 문제인가 싶은 생각에 지방의 여유로운 삶이 그립기도 했다.
그렇게 비슷비슷한 하숙집들을 둘러보며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다섯 번째 집이자 마지막 집을 둘러보았다. 겉모습이 제법 깔끔하고, 학교까지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라 일단 마음에 들었지만 반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의 방이 그나마 마음에 들어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 집으로 결정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나는 여전히 걱정 투성이었지만 아들은 부모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작은 세상을 이루게 된 것에 설레 하고 남편도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10살짜리 아이의 등굣길을 걱정하며 이사를 하던 10년 전이나 다 큰 20살 아이의 하숙집을 걱정하는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걱정 투성이다. 훗날 오늘을 돌아보면서 10년 전 그날처럼 지금의 내가 우습게 느껴지겠지. 그리고 10년 뒤에 내 눈에는 여전히 아이이기만 한 30살 먹은 성인 남자에 대해 나는 또 어떤 걱정으로 거실과 주방을 오늘처럼 뱅글뱅글 돌게 될까? 유달리 걱정이 많은 나뿐 아니라 결국 모든 부모가 가지는 숙명 같은 삶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