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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Feb 24. 2020

느린 변화, 진짜 변화

나의 체벌 역사

  4년간 묵혀놓은 교실의 엄청난 짐을 혼자 옮기는 게 어려워 개강이 연기되어 집에서 무료해 몸 치는 아들 녀석을 끌고 한적한 토요일 오후에 이제 마지막 방문이 될 나의 근무지 학교에 왔다. 아들은 내 책상 주변을 치우다 쪽지를 하나 발견하고는 킥킥 웃었다.

  "엄마, 어떤 애가 엄마한테 그동안 안 감사했대."

  "응? 무슨 소리야?"

나는 아들이 건네준 쪽지 희미하게 쓰인 한 문장을 한참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동 안 감사했어요. - 00훈-"

  "아 우리 0훈이네. 이 녀석 올해 날 가장 힘들게 했어. 근데 잘 봐. 이거 맞춤법이 틀려서 고쳐 쓴 거야. '그동안 감사했어요'라고 쓴 거네."

"아? 그래? 아닌 거 같은데?"

아들은 여전히 웃기는지 계속 실실 웃는다.


   20여 년 전 내가 신입교사로 처음 맡은 학년은 1학년이었다. 신입교사에게 1학년은 거의 주지 않는데, 9월 발령이라 그렇게 되었다.  무지한 초보 교사였던 나는 잘못에 대해서는 회초리로 일벌 백계하는 원리원칙주의 체벌 교사였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훈육 차원으로는 때리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한 아이의 일기장을 보았다.   아이의 일기장에는 동생과 학교 놀이를 하는 내용이 쓰여있었는데, 선생님 역할을 맡은 그 아이가 학생 역할을 맡은 어린 동생에게 '넌 잘못했으니 맞아야 돼. 학교에서는 원래 잘못하면 맞는 거야' 하며 때리는 시늉을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일기장 속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끄러운 나를 보았다.  무지몽매한 한 교사가 백지와 같은 1학년 어린아이에게 학교와 교사, 그리고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만드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아이에게 손을 들고 서 있게 하거나 눈을 감기는 벌은 꾸준히 주었다.  나는 그 후로 6학년을 주로 맡았는데, 나는 그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철없는 교사여서 편한 마음에 아이들이 말 안 들으면, 정강이를 차는 시늉이나 심지어 가볍게 실제 차면서 눈을 부라렸다. 아이들은 그런 나의 장난 같은 위협을 좋아하면서도 조심하기는 하였다.  지금 그런 액션을 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다.  나의 체벌 역사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굴욕사는 4학년을 맡았을 때이다. 내가 드라마를 많이 본 탓인지 그때 무슨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전체 아이들에게 실망한 나는 그들을 감화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빗자루 막대기를 주며 나를 한 대씩 때리라고 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나의 고함에 가볍게 한 대씩 내 손바닥을 때렸는데, 여러 대가 모이자 점차 손바닥이 벌겋게 변해갔다.  결국 아이들이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잘못했다고 외치며 엉엉 울어버린, 겉으로는 아름다운 결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심리를 이용한 어리석은 체벌 교사의 한 면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그런 어리석은 체벌도, 감동을 짜내기 위한 작전도 하지 않으며, 만약 한다면 아이들의 눈물은커녕 반발을 불러 것이다.  감상과 체벌이 횡행하던 20세기를 지나 이성과 냉정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내  기껏해야 쓰는 방법은 카운트 세기, 안되면 5분 뒤에 서 있기 안되면 상담, 더 심하면 반성문 쓰기, 부모님 상담 정도이다.  0 훈이를 비롯한 우리 반 말썽꾸러기 3명 정도가 주로 이 코스를 밟았다.  이제 더 이상 강함은 강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완력으로 이기려 하면 아이들은 가슴에 분노를 키운다.  이런 아이들은 대게 상처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 상처는 누를수록 아프고 커진다. 그 상처를 어루만지되, 필요할 때는 따끔한 소독약 처방도 가끔 필요하다. 그 과정이 상담이다. 하지만 문제의 발생은 주로 수업 중에 일어나고 상황이 복잡하보니 일단 바로 해결이 어렵 항상 논점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그래도 상담의 방법을 고민하며 노력하는 것이 인간을 기르는 교육의 힘이 아닌가 싶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우연찮게 0 훈이의 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0 훈이가 이제 선생님 못 본다고 집에 와서 울먹거리더라고요. 3학년 선생님이 최고였다고. 항상 감사했습니다. "

나는 감사한 이 문자에 살가운 답변보다 0 훈이의 이런저런 심리적 불안과 분노조절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또 잔뜩 쓰고는 그래도 0훈이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 많았감사하다고 간단히 쓰고 나의 2019 마지막 상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코로나 19 때문에 새 학교로의 전근일단 연기되면서 내 소속이 붕 떠버린 지금, 언젠가 만나게 될 이름도 모르는 2020학년도의 나의 아이들을 위해 좀 더 준비의 시간을 갖고 출발하겠다 마음먹어본다.


  그렇게 0 훈이를 비롯한 우리의 꾸러기들은 느리게 느리게 변화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이 에서부터 진짜 변화라고 믿는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하길 '70년이 되어서야 머리로 사랑하는 것을 가슴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고백 것처럼 나 또한 25년이 되어서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리에서 겨우 목구멍까지 내려왔으니 퇴직할 때쯤에는 가슴으로 사랑하게 되는 꿈을 감히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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