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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Feb 27. 2020

나의 창조적 파괴를 꿈꾸며

휴게소의 혼밥 코너를 보면서

 얼마 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갔는데, 한 편에 [혼밥 코너]라는 팻말이 붙어 있고, 마치 독서실 책상 같은 칸막이 좌석들이 줄지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길 신경 쓰지 않고 혼자 편안하게 밥을 먹는 공간이었다.


  혼밥이라는 말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고 버젓이 안내판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말의 탄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혼자'라는 말의 줄임말 '혼'과 명사 '밥'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 말, '혼밥'.  따져보자면 비문법적이면서 비국어적이다.  나름 국어를 전공하던 대학시절, 국어와 우리말을 신줏단지처럼 생각하며 절대 파괴되어서는 안 되는 원칙이었던 국어의 조어법과 문법이 이제는 일상으로 파괴되는 현실에 대해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 시절 느꼈던 거부감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창조를 위한 파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먹거리'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들었던 거부감. 어간 '먹'과 '거리'라는 접미사가 어떻게 붙을 수 있지 하는 생각. 그리고 한 때 젊은 아이들이 만드는 줄임말로 표현되는 은어 같은 이상한 말들에 대한 불편한 생각.(생일선물이 생선으로 불리는 이상함)


  하지만 언어는 어차피 그 사회의 산물이고 결국 파괴되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또다시 파괴되는 변화의 존재인 것, 그렇게 언어의 탄력성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과거에 어떤 것에 대한 명명이 필요 때, 표음문자인 국어는 조의성이 좋은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만들어진 어색한 결합어 내지 복합어가 난무했다 사라졌다. 나름 성공한 낱말들도 있는데, 탈북민을 하는 새터민 등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이고 그 자리를 결국 외래어와 한자어가 대체했다. 언어에 대한 탄력적 생각, 문법 파괴에 대한 거부감 버리기, 줄임말을 유쾌한 반란으로 받아들이는 융통성이면 한글의 줄임말, 문법 파괴를 통한 조어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사고의 유연성이 결국 언어의 탄력성을 가져왔다. 우리 한글도, 우리 국어도 조어력이 향상되며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게 그런 것 같다. 혁신이라고 흔히 불리는 창조적 파괴는 이제 모든 분야에서 대세가 되었다. 학문의 경계, 예술의 경계, 가치관과 규범까지, 그리고 심지어 생명의 가치과 종의 경계마저도. 그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을 갖던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그 파괴가 가져올 혼란이 두렵고, 그 혼란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해칠까 불편하다. 하지만 한글의 절대적 규범이 깨지는데 걸렸던 시간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 걸려 이러한 창조적 파괴는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정말 가치 있는 가치인지, 깨뜨려야 할 가치인지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한번 파괴된 후에 부서진 가치를 복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에서의 혁신도 그러하다. 과거 열린 교육, 협동학습, 배움 중심 교육, 하부르타 등의 이름으로 혁신의 바람이 불어왔고,  학교와 교육의 경계는 창조적 파괴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현재 혁신학교까지 이렀다.  하지만 파괴해야 할 것들은 여전히 견고하고, 지켜야 할 가치들은 흔들리고 있다.   4년의 혁신학교에서의 설레는 시간을 뒤로하고 일반학교로 전근을 희망하였고 나는 이제 떠난다.  4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깨야 할 것이 학교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자꾸 나 자신의 편안하고 권위적인 관성의 의자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 내려와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 자꾸 형식적인 문제를 혁신하느라 나의 내면의 혁신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외면해 왔다. 그래서 나의 혁신을 위해 올해를 고민해 볼 생각이다.  


 이런, '혼밥'에서 시작해서 너무 멀리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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