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유치한 것이다. 대단한 발견을 하고, 뜻깊은 일을 해내면서 느끼는 위대한 성취의 행복도 있지만 그런 고귀한 행복보다 그냥 뇌의 신경다발 끄트머리를 짜릿짜릿하게 해 주는 본능적인 감정이 행복의 본질이 아닐까? 그래서 어쩌면 유치할수록 더 짜릿하고, 더 행복한 감정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까지 아주 행복했었다. 코르나가 나의 일상을 덮치기 전까지. 그리고 나는 최근까지 몰랐다. 행복과 고통은 결국 양면을 가진 쌍둥이라는 것을.
방탄소년단의 컴백을 앞둔 지난 두어 달 내가 느꼈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이십만 명 중에서 대략 몇백 명만이 누리는 좋은 자리에 당첨이 되었을 때의 나의 행복 그래프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 하루하루 그날만을 기다리며 새로 나온 앨범의 음악을 24시간 들으면서 짜릿한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뜬 콘서트 취소 공지로 인해서 나의 행복 꼭짓점은 그 순간 뒤집어지면서, 수천 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수직 낙하하였다. 그 순간 터질 것 같은 상실감에 듣고 있던 음악도 모두 내던지고 무음과 무중력의 우주 공간 같은 빈 방에 그대로 누운 채 눈물 몇 방울 흘리는 것으로 이겨내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나는 현실 부정과 현실 인정을 왔다갔다하는 심리 공황을 겪으며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회사에 메일을 보낼까 컴퓨터 앞에 앉아 보아도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고, 팬들이 모이는 sns에 들어가 보아도 나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감정적인 글들과 어쩔 수 없으니 참아야 한다는 냉혹한 글들 속에 갇혀서 더 숨이 막혀 왔다. 위로를 받고자 음악을 다시 듣다가, 음악을 듣는 게 더욱 허무하게 느껴져 꺼버리기를 반복하며 또 하루가 지났다. 텔레비전 뉴스에는 방탄소년단 팬들이 콘서트 예매 취소로 받은 환불금으로 기부를 한다는 훈훈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예매 취소를 위해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갈 용기가 아직 나지 않는데 다들 슬픔을 승화하는 대범한 용기에 존경심이 들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래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온 나라가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토록 가슴 아파하냐고유난 떨지 마라고 말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 지금 나의 소소한 행복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이제껏 영화에서만 보던 재난 상황이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말이다. 개강을 앞둔 아들은 또다시 개강이 연기되면서 점점 기운이 빠져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자고 있고, 남편도 회사 실적에 타격이 많다고 힘들어하고 있다. 나 또한 새 학교 전근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올해 1년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보통이 아니다. 좋아하던 산책도 못 가고, 감옥 같은 삶이다. 나도 나의 철없는 투정과 속좁음에 화가 난다.
행복은 어차피 주관적이다. 작년 콘서트를 다녀와서 나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대한 글을 썼었다. 내가 다시 그들의 무대를 현장에서 볼 수 없을까 봐. 그날의 두려움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작년의 그 무대가 나에게 마지막이 돼 버리고 올해 더 이상 한국 공연 계획은 없고, 있다 해도 내가 당첨될 확률은 아주 미미하다고 느껴지면서. 나의 유치한 행복은 그렇게 유치함만 덩그러니 남을 것 같아서.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는 항상 애완견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훗날 강아지를 잃을 상실감이 무서워서 결국 키우지 못했다. 고귀한 행복이건, 유치한 행복이건 행복은 결국 상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 일로 행복했다면, 결국 언젠가 행복의 크기에 비례해서 슬픔도, 상실도 찾아오겠지. 그 슬픔이 두렵다고 행복을 피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유치한 슬픔도 곧 이겨낼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의 슬픔과 좌절을 유치하다 말하고 싶지 않고, 이 시국에 철없다 말하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내 가슴은 지금 그냥 아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