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2. 목.>
아침 9시, 근무 시작.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휴대폰을 겨우 떼어내고 커피 한 잔 들고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노트북을 켠다. 공문이 하나 와 있다. 새로 맡은 업무라 한참을 읽어도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재차, 삼차 읽으니 대략 알겠다. 하지만, 몇몇 용어의 의미가 명확히 와 닿지 않아 인터넷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찾아본다. 대충 이해하고 공문에서 요청한 내용은 다음 출근일에 교감선생님과 최종 의논해 봐야 할 듯하다. 이렇게 공문 하나 이해하는데 1시간 가까이를 허둥지둥 보내고, 이미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칼칼한 목 안으로 들이킨다. 그리고 어제부터 듣던 <비상상황을 대비한 원격 수업 연수>를 이어서 듣는다. 빈 커피잔을 채우러 거실로 나가다 다음 주 재택근무 신청서를 오늘쯤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커피 향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컴퓨터에 앉아 재택근무 신청서를 올리고 다시 연수를 듣는다. 연수를 듣다 내부 메일로 보내야 하는 파일이 있음이 퍼뜩 생각난다. 또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업무 사이트를 열고 파일을 최종 확인하고 보낸다. 그렇게 모니터에는 여러 개의 창이 다닥다닥 붙기 시작한다. 이거 하다 저거 생각나면 또 저거로 넘어가는 나의 우왕좌왕 일 패턴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변함이 없다.
벌써 12시다. 아직도 아들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자기 방에서 인기척도 없다. 어제는 몇 시에 잔 걸까? 2019년 그렇게 가고 싶다 목놓아 부르며 공부하던 그 학교를 2020년이 되어도 계속 가고 싶다고 목놓아 부르며 못 가는 슬픈 신입생 이야기가 우리 집에서도 진행 중이다. 몸의 표면적을 최대한으로 침대에 붙이고 누워 있는 꼴이 보기 싫어 그냥 휴학하고 군대 가라고 괴롭히는 중이다.
점심 메뉴를 정할 겸 가벼운 산책을 나왔다. 잠깐 산책을 하고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2개 포장해 나오는데, 낯선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다. 이어폰을 꽂아둔 채로 휴대폰에 귀를 대고 '여보세요'를 수차례 외치는 바보 같은 나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 전화기는 꺼져 버렸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새 직장인 S초등학교 전화번호였다. 처음 들어보는 교무 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
"저 교문데요, 교육복지 관련해서 문의전화가 왔어요. 학부모 전화번호를 메시지로 보낼 테니 연락 좀 부탁해요."
비록 전화상이지만 첫 만남의 어색함 따위는 없는 간결한 말씀. 나도 아직 이 업무를 잘 모르는데, 해결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걸어 문의 내용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끊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컴퓨터를 켜고 관련 업무를 확인한 후 전화를 해서 대략 안내해 드렸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업무, 그리고 재택근무 이 세 가지가 엮여 만든 미로에 갇혀버린 기분이다. 그리고 또 오전에 듣던 원격 연수를 계속 듣는다.
오후 5시가 되자 안전 안내 문자가 뜬다. 이틀 동안 없던 확진자가 2명 더 발생했다. 그제야 밖에서는 코로나와의 뜨거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나는 어디 망망대해의 돛단배 위에 떠 있는 듯한 고립감을 맛본다. 또 다른 고립자, 아들이 언제 일어났는지 나타났다. 다음 주부터 시작될 사이버 수업 강의 계획서를 내 앞에 들이민다. 강의 내용과 과제가 빽빽이 쓰여있다.
"와, 매일 놀다가 이거 하루 종일 들으면 너 엄청 빡빡하겠다. 어쩔래?"
내가 주는 겁 따위에 이제 벌벌 떠는 순진한 소년이 아닌 아들은 어깨 한 번 으쓱하고는 내가 건네준 햄버거를 받아서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아들이 먹는 오늘의 첫 끼니다. 언제 쓰일지 모를 3월 학급 경영 ppt를 좀 더 손본다. 그리고 6시. 컴퓨터를 끄며 나의 제2의 직업전선인 부엌을 향해 출근한다. 그렇게 코로나가 안겨준 나의 첫 재택근무는 물속에 잠긴 듯한 몽롱함으로 내일도 이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