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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ug 24. 2020

여름 오수 (독서 한탄기)

책 사피엔스를 마무리하다

오늘도 잠이 쏟아진다.

여름 낮잠은 너무 싫다. 겨울 낮잠이 상큼한 비타민 같은 휴식이라면 여름 낮잠은 물기 젖은 해초를 뒤집어쓴 듯,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여름 날씨나를 물 먹은 하마로 만든다.  어차피 하마를 오마주한 나의 몸일지언정 정신만은 고고한 학처럼 청명하고픈데,  여름 낮잠은 나를 늪 속 하마처럼 무겁고 눅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항상 낮잠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청소를 할 때는 그나마 나의 이성의 힘으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다.  하지만 원격 연수를 듣거나 업무를 처리할 때면 정신의 절반이 공기 중 습기를 머금고 서서히 중력을 향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독서를 하고자 책을 펴는 순간 나는 폭염 습도 속으로 순식간에 잠수하고 마는 것이다. 에어컨을 켜도 낮잠의 힘을 이기기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청량함에 더욱 깊이 잠들 수 있다.


  그렇게 여름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소파에서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늘어진 나의 몸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총 균 쇠>의 작가,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서구 유럽과 동아시아가 다른 지역보다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던 까닭이 가축과 세균의 덕이라고 했던가.  나는 잠에서 덜 깬 채 반쯤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해버렸다.  "총 균 쇠가 아니라 습하고 더운 기후가 문명의 성장을 방해한 주요 원인이야. 제기럴."


   적당한 냉기와 건조함은 인간의 두뇌를 원활히 가동한다. 하지만 습도와 더위가 혼합된 후덥지근한 기후는 인간의 의식을 무력화시킨다. 결국 게으름과 나태함, 그리고 무력감이 뒤섞 몽롱함만이 뇌세포 사이에 똬리를 트는 것을.

 


  사흘 만에 책을 집어 들었다.  사흘 전에 읽은 것도 꾸벅꾸벅 졸며 겨우 2쪽을 읽은 것이 전부이다.  인터넷과 sns가 세상을 휩쓰는 시대에 책을 아주 조금 좋아하던 한 룸펜에게 이제 책은 하루 활동의 마무리 코스가 된 지 오래이다. 인터넷과 sns를 두리번거리다, 눈꺼풀의 무게가 중력을 향해 달릴 때쯤 책에 대한 빚을 갚는 양 마지못해 책을 펴지만 5분도 안되어 눈 앞에 활자들이 춤을 추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잠을 깨려고 다시 휴대폰을 들면, 1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다시 책을 펴면 5분 만에 잠에 빠져든다. 결국 책나라가 아닌 꿈나라로.


   하지만 그럴수록 영상과 sns 시대에 독서는 나에게 더욱 기적이고 힘이다.  독서와 멀어질수록 독서에 몰입하는 몇 분간의 짧은 지적 희열은 너무 짜릿하다.  어쩌면 그래서 책의 힘은 더욱 세지고 있다. 책을 읽는 사고 작용은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인터넷 글을 읽는 것과는 뭔가 다르다. 머릿속에서 어떤 사고 과정의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 니터 속 동영상이 물리적인 사고 과정이라면 독서는 화학적 변화 과정에 가깝지 않을까? 완전한 역학 변화가 일어나는.  

하지만 이 두꺼운 책 <사이언스>를 읽기 시작한 지 어언 몇 달이건만 아직도 중간 어디메를 헤매는 나는 한 달에 한 권은커녕 일 년에 한 권 읽기 대기록을 올해 세우려나 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독 여행지에 가서는 나도 독서광이 된다. 쾌적한 호텔의 환경과 편안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낯선 곳의 설렘, 청소와 식사 준비를 안 해도 된다는 여유 등이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가면 산책과 독서 외에 다른 것은 잘 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 전  나는 청송의 한적한 리조트에 틀어박혀 사피엔스의 중반부터 후반까지를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사피엔스의 종말>이라는 마지막 터(겨우 30여 쪽)만 남기고 뿌듯한 가슴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책을 끝내리라 설레는 마음으로.


  하지만 돌아오는 날 나는 왠지 너무 가벼워진 몸과 마음이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 이제 겨우 한 챕터 남은 책을 그만 리조트에 두고 온 것이다.  '아, 이럴 수가!' 하는 통탄의 마음도 짧게 추스르고,  몇 번의 통화 끝에 겨우 연결된 리조트 담당자와의 전화에서 책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착불 4천 원으로 책을 받기로 했다. 한 챕터의 지식과 4000원의 가성비를 잠깐 고민했으나 나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기어코 4000원에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마지막 독서를 장렬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나의 또 다른 여행지로 학교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나는 독서대에 경건하게 책을 올리고 찬 바람 칼칼하던 지난 1월에 시작된 독서 대장정 <사피엔스>를 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곧 신이 될 사피엔스의 후예들이 결국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 종결시킨다는 섬뜩한 희망의 메시지를 4천원에 확인였다.


   "야! 지금 몇 시지? 오후 2시 15분이야."

나의 날카로운 외침에도 안방 침대에 널브러진 사람  사피엔스 종로 보이는 20살 된 유인원 하나가 무더운 여름 속에서 몇 시간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사피엔스의 어미는 바가지 가득 물을 떠 와 냅다 뿌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 인간아. 아직 자고 있으면 어떡해.  또 밤낮이 바뀐 채 살려고. 얼른 안 일어나!"

갑작스러운 물벼락을 맞은 그 사피엔스는 잠깐 몸을 부르르 떨며 꿈틀대더니 계속해서 잠을 다.

기가 막힌 어미는  새끼 사피엔스를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책 몇 권을 집어들고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며 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물벼락도 여름오수는 못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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