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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pr 11. 2021

아이의 오춘기

  코로나 때문일 것이다.  지난 1년간 아들은 심하게 무기력했다.  그 무기력을 이겨보려고 한동안 의욕적으로 사는 모습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다 또 일주일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1년 동안 아이는 때 아닌 오춘기를 맞았다. 어린애에서 청소년기를 거치며 겪었던 사춘기를 다시 어른이 되기 위해 겪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말했다.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어.  더 이상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어.  그다음이 있을 거란 생각은 결코 못했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대학에 들어가니, 다시 처음으로 셋업 되는 거야. 다시 출발점이 돼버린 거지.  더 열심히 살아야 되고 고등학교 때처럼 정해진 방법도 없는 거야.  악몽에서 깼는데 또 다른 악몽일 뿐이더라고.  난 그게 견딜 수 없어. "


  코로나때문만은 아니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그동안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아니었구나.'  너무 쉽게 아이를 키우려고 한 것일까?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를 보며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했던 칭찬이 잘못된 것인 줄 몰랐다.  그것이 아이에게 꿈을 좋은 대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나 싶었다.  모험이나 도전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이에게 뭔가 도전과 시련을 안겨주기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게 한 것이 아이에게 좁은 시야만을 만들어 주었나 싶었다.  


  아이는 중고등학교 때도 딱히 꿈이 없었다.  나는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대학 가서 꿈을 꾸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꿈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감히 그것을 꿈이라 말할 수 없었다.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나는 교대를 가야 한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그 외의 꿈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나는 아이가 꿈이 있던 없던 아이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랐다.  아무리 엉뚱한 꿈이라도 지원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어려운 퍼즐이었던 것일까? 나의 자유주의 교육은 아이를 유약하고 꿈을 갖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나?


   꿈이 없었던 아이는 경영학과에 들어가면 다 된다는 남편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 좋게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 학교는 정글 같은 경쟁적 입시교육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특목고와 강남 아이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 아이들은 이미 몸에 밴 경쟁의식과 인생 비전에 대해 확고한 목표의식으로 코로나 상황에서도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자신과 같은 또래지만 완전 다른 느낌의 인종을 만난 듯한 아이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이러한 삶에 대한 적극성과 미래에 대한 확고한 자세는 아이를 더욱 낯선 이방인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아이는 후회했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폭넓게 살지 못한 것을.  그래서 좀 더 꿈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꿈꾸지 못한 것을.  그 말을 들은 나 또한 아이를 다양한 세상의 바다에 풀어 두고 강하게 키우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이제 대학 2학년이 된 아이는 아직도 대학 강의실에서 같은 과 친구들과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전히 부산 외곽의 한 아파트, 자기 방 작은 모니터를 통해서 교수의 강의를 2년째 듣고 있다.  그동안 선배, 동기들과 몇 차례 만남을 가졌지만 허공으로 던져지는  단편적인 문장만이 가득했던 파편 같은 관계성 속에서 아이는 어떤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면서도 현재의 편안함도 포기 못하는 무기력의 순환을 벗어나 보려 애쓰고 있다.


   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계속 재수를 할까를 고민하였다.  대학의 게시판에는 문과대생들의 취업난과 미래 비전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들이 수시로 올라왔다.  결국 아이는 한의대를 가려는 고민을 어렵게 털어놓았고, 나와 남편은 반대했다.  그 또한 아이의 꿈이 아니라 좋은 대학처럼 아이에게 좋은 직업으로 비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명문대에 오면 문과든 무엇이든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고, 나와 남편은 무엇을 하든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자기 하기 나름을 위해 더 이상 전력 질주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봤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또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소설 <데미안>의 글귀처럼 아이는 자신의 공고하고 명확하고 좁았던 작은 세계를 깨고 나오는데 두려움과 아픔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깨고, 날아오르는 것은 곧 자신을 부수는 일이기도 하다.  부모의 도움 속에서 살아왔던 유아와 청년의 모습이 혼재한 현재의 아이는 이제 독립된 청년이 되기 위해, 그래서 선과 악처럼 명확한 정답이 없는 불투명한 세상에서 스스로 답을 만들어야 하는 세상으로 날아올라야 할 것이다. 그 신의 이름은 바로 실패를 마주할 수 있다는 용기와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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