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터 어답터의 비애

애플사여. 각성하라

by 연구하는 실천가

결국 오늘 산책을 가지 못했다. 며칠간의 강추위가 끝난 토요일 오전, 이 상쾌한 쌀쌀함이 얼마만인가?

정말로 산책을 재촉하는 날씨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그것은 바로 이어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남다른 신념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현재 사용하는 물건이 망가지기 전에 새 물건을 사지 않는다'이다. 대표적으로 10년을 넘기고 계신 우리 집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등이 그러하다. 이 절대로 고장 나지 않는 물건을 제조하신 모 전자회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와 짜증을 함께 보내드린다. 또 하나는 '기존의 물건이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는데 새로운 기능이 부가된 물건을 다시 사거나, 추가로 사지 않는다'이다. 주변에서 '세탁건조기'와 '에어 프라이어기'의 예찬을 수차례 듣고 있으나, 나의 뇌리에는 '굳이?'라는 단어가 아직 남아 있다. (사실 '에어 프라이어기'는 요즘 고민 중이긴 하다.)


이런 신념으로 인해 오늘 나는 눈물을 머금고 산책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의 물건이 망가지기 전에 새 물건을 사는 것은 지구에 환경오염물질을 더 보태는 일일 뿐이라는 나름의 신념가인 레이터 어답터 박 씨는 몇 달 전, 난생처음 휴대폰이 작동하는데도 불구하고 새 휴대폰을 장만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들의 휴대폰이 고장 나서 새로 사러 같이 매장에 갔고, 나의 엉망징창 흠집 난 휴대폰 액정을 못 마땅해하던 남편이 무작정 새 휴대폰을 사라고 밀어붙인 까닭이다. 결국 나는 얼떨결에 아들과 같은 기종의 아이폰을 사게 되었다. 이때까지 유행 지난 국산폰만 사던 내가 그나마 최신폰에 그것도 아이폰을 사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른 채 무덤덤했다 ( 사실 기존 휴대폰을 더 쓸 수 있는데 새 휴대폰을 샀다는 사실에 오히려 찜찜했다 )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나는 바로 10살 꼬맹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얼리어답터의 위력이구나 싶었다. 나도 몰랐던 아이폰을 가진 자의 의미를 아이들의 환호로 알 수 있었다.

" 와, 선생님 휴대폰 봐. 아이폰이야."

" 와, 부럽다. 나도 저거 정말 갖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가격부터 해서, 휴대폰과 관련된 -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 각종 질문들을 뱉어냈다.

나는 갑자기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소위 인싸가 되어서 "난, 그런 거 모르는데? 그냥 직원이 알아서 해줬어."를 연발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이렇게 많아질 줄 알았으면 진작 살 걸 그랬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아이폰으로 바꾸어서 불편한 점이 없냐고 나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나는 이 신상폰으로 기껏해야 카카오 톡과 트위터, 브런치 정도밖에 하지 않으므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다 휴대폰 구입 며칠 만에 아이폰의 결정적 불편함을 발견하고 휴대폰을 바꾼 것을 땅이 꺼져라 탄식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이어폰 문제였다. 나는 모든 물건을 살 때 최소한으로 사는 편이지만 이어폰만큼은 욕심을 낸다. 그래서, 한 번에 여러 개를 사서 내 방에 두어 개, 교실에 한 개, 차 안에 한 개, 가방에 한 개를 둔다. 그리고, 산책이 당기는 순간이 찾아오면 내 손이 뻗어지는 어떤 곳에든 놓여 있는 이어폰을 들고 길을 나선다. 왜냐하면 나의 산책길에 이어폰은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산책로의 꽃들이 나를 반겨주고, 강변의 청둥오리와 고니의 멋진 자태에 눈길이 가도, 그것을 받쳐줄 BGM이 없는 산책은 전적으로 거부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많은 이어폰들이 아이폰을 사는 순간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폰에는 이어폰을 꽂는 구멍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충전기 꽂는 곳에 이어폰을 연결하면 되지만, 아이폰 충전기 모양을 가진 이어폰 줄은 어디에도 팔지 않았다. 다이소에서 산 연결잭을 끼워 사용하려 해 보아도 충전은 가능하지만 이어폰 기능은 작동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구입한 매장에 달려가 고충을 털어놓았다. 나를 불쌍히 여긴 그들은 매장을 뒤져 겨우 줄 달린 이어폰 한 개를 구해 주었고, 내가 추가로 더 구매하고자 요청했지만, 구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저렴한 블루투스 이어폰도 많이 있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나는 돈 때문에 줄로 된 이어폰을 이때까지 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다른 신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저, 새로운 물건에 대한 불편함과 귀찮음이 가장 큰 이유이다. ‘마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왠지 귀에 몇 시간을 꽂는 것인데 이걸 무선으로 한다고? 그럼 전자파는? ' 따위의 걱정쟁이다운 이유들. 또, 이런저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서너 개 더 댈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남들이 다 갖고 있지만 나만 없는 것들이 소소히 많은 편이다.


그렇게 나는 소중한 이 한 개의 아이폰용 이어폰을 나름 잘 사용했다. 그러다, 어제 차량이 갑자기 고장이 나서 급하게 수리센터에 맡기게 되었는데, 그만 차 안에다 하나뿐인 나의 이어폰을 놓아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오늘처럼 화창하며 싸한 날씨, 그러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산책하기 좋은 날씨에 나는 이렇게 회색 모니터 앞에 앉아 신세한탄의 글 따위를 쓰며 울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물건이 등장하면 기존의 물건은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그럼 기존의 물건을 고수하던 레이터 어답터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물건으로 비자발적 이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레이터 어답터는 서럽게 불편을 감수하며 새로운 사용자로 적응해 살아간다. 물론 그렇게 쓰다 보면 이렇게 좋은 게 있었나 싶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외친다.

애플사여, 각성하라.

다이소에 가득히 쌓여 있는 각종 이어폰 중에 왜 아이폰에 맞는 이어폰은 없는 것인가?

집에 무수히 쌓여있는 기존의 이어폰을 다 버리란 말인가?

차가우면서 따뜻한, 일년에 열 번 있을까 말까한 이런 날씨의 산책을 망친 애플사는 각성하라. 각성하라.


그리고 이어폰 줄을 사랑하는 소비자여 일어나라.

곧 국내 다른 휴대폰도 이어폰을 꽂을 구멍이 사라질지 모른다.

일어나라.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