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려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누가 나를 빼꼼히 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얼마 전까지 신고 다니던 빨간 운동화다. 남편이 신으려고 구매했지만 남편에게 조금 작아서 결국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 내 발에는 또 너무 커서 걸을 때마다 신발 안에서 발이 달랑거리며 논다. 그래도 신발 입구가 고무줄로 되어 있어서 벗겨지지 않는다. 이런 헐렁함에 오히려 발이 편하다. 그렇게 신게 된 이 빨간 운동화는 아무래도 모양이 뭉툭해서 처음에는 산책용으로만 신었다. 그러다 점차 마음에 들어 외출용도 겸해서 자주 신는 신발이 되었다. 몸에 착 붙는 청바지를 발목 위까지 접어올리고, 이 커다란 빨간 운동화를 신고 폴짝폴짝 걸으면 내가 꼭 말괄량이 삐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 빨간 운동화를 그리 오래 신지도 않았는데 벌써 신발 뒤축 헝겊 부분이 헤지면서 안에 신은 양말이 비치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벚꽃 빛깔을 닮은 연분홍색 운동화를 최근에새로 구입하였다. 신어 보니 발에 꼭 맞고 날렵한 모습이 산뜻하고, 이 신발을 신고 걸으니 벚꽃이 흔들리는 것 같아 걸음도 가벼워진다. 벚꽃이 후드득 떨어지던 어느 날,벚꽃 운동화를 신고 막 출근하려는데, 빨간 운동화가 촉촉한 눈망울을 하고 그렇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이다.
결국 이날 나는 벚꽃 운동화를 가만히 벗어 두고, 헤지고 낡은 그리고 커다란 빨간 운동화를 신고 텀벙텀벙 출근하였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나도 새 것이 좋다. 하지만 그동안 써 왔던 물건에 대한 애정을 잘 놓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물건이 도저히 쓰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바꾸고, 바꾸어도 기존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 물건은 어딘가에 고이 모셔지기 일쑤다.
특히 타고 다니는 차에 애정이 유난한 편이다. 몇 년 전 낡은 경차를 중형 차로 바꾸었을 때도 나는 한동안 나의 꼬마차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같은 색깔의 차종이 지나가면 혹시 중고차로 팔린 나의 꼬마차인가 싶어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무겁고 느려 터진 오래된 노트북을 날렵하고 반짝거리는 새 노트북으로 바꿨을 때도 굳이 버벅거리는 헌 노트북을 계속 쓴다. 지금도 헌 노트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왠지 이 녀석을 안 써주면 곧 퇴물이 되어 못 쓰게 될 것만 같다.
더 예쁘고 더 좋아진 새 물건들이 헌 물건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아직은 제 구실을 하기에 크게 불편함이 없는 옛 것이 자꾸만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마치 감정을 가진 인간인 듯 애잔해지는 것은 분명 모든 사물에 과몰입하는 나의 감성이 문제인 듯싶다.
새 물건은 아직 서로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낯선 손님 같은 존재다. 조심스럽고 소중하지만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옛 물건은 만만해서 툭 치면 척 알아듣고 픽 웃어주는 친구고 가족 같다. 새 운동화는 얼룩이 묻을까 신경 쓰이고, 새차는 흠집이 날까 걱정되고, 새노트북은 떨어뜨릴까 조심스럽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 같은 옛 운동화는 신을 때 내 발에 꼭 맞춘 것처럼 발이 쏙 들어가고, 내 발을 편안히 감싸준다. 오래된 차는 내가 손만 뻗으면 정확히 그 자리에 원하는 버튼이 있다. 그리고 나와 한 몸이 된 듯 요리조리 골목을 잘도 지나간다. 새 노트북은 키보드를 쳐다보지 않으면 오타가 나기 일쑤이지만, 헌 노트북은 키보드에 놓인 내 손끝만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원하는 글자들이 투두둑 잘도 튀어나온다.
새 물건은 나와 공유한 시간이 없었다. 빨간 운동화는 나와 함께 걷던 공간과 시간이 운동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 꼬마차는 좁은 차 안에서 오랜 시간 내 웃음과 내 눈물과 내 노랫소리를 받아왔다. 헌 노트북은 내 땀과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키보드에는 그런 내 손때가 가득하다. 헌 물건들은 그렇게 나의 DNA가 그대로 복제된 생물인 듯 나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반들반들 새 운동화, 반짝거리는 새 차, 날렵한 새 노트북이 나를 길들이고 있다. 나의 DNA를 복제하고 곧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럼 기존 나의 옛 것은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의 깊은 기억 속으로 스며들 듯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