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구하는 실천가 May 15. 2022

우리네 이야기, 드라마 ‘파친코’

  드라마 파친코의 1화를  후부터 계속 파친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 잡힐  잡히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역사드라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역사드라마와 뭔가 다른 결에서 내가 느끼는 감동의 지점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문장을  놓고  , 대략의 글을  놓고   달을  놓고 있었다.


 두 달 전 쓴 첫 문장은 이것이었다.

"땅 한 줌 없던 우리네가 사는 세상이 언제는 힘들지 않았겠냐만은 나라를 잃었던 그때의 설움은 뭐라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이 한 줄이 영 마뜩잖은데도 마땅히 바꿀 말이 내 재간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 한 줄에서 내내 머물러 있던 나는 결국 내 목구멍에 걸려 있던 이 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땅 한 줌 없던 우리네가 사는 세상이 언제는 힘들지 않았겠냐만은 나라를 잃었던 그때의 설움은 뭐라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역사극은 원래 지배층의 이야기이거나 그 지배층을 뚫고 나간 큰 발걸음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지. 핍박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본인의 신념에 의해서 선택한 그런 위대한 고난을 그린 이야기였지. 그래서 말이야, 일제강점기의 우리네, 그중에서도 여성, 그중에서도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라면 그저 설움을 견디는 삶이 다였을 텐데 무슨 이야깃거리가 되겠어. 그러니까 여태껏 이런 우리네 이야기를 말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별로 없었겠지. 그런 점에서 파친코는 분명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어. 더구나 미국 자본으로 미국 감독이 만든 드라마라니 얼마나 이상하면서도 설레면서도 낯설던지.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재일교포라는 이민자의 이야기에서 어떤 공통의 감정을 느껴 만든 것이겠지만, 묘하게도 내게는 전혀 이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인의 이야기로만 보였으니까.  처음에 미국에서 조선인의 이야기, 그것도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의 이야기를 미국의 자본으로 만든다고 하여 원작을 모르는 나의 입장에서 그저 뜻뜨미지근한 근현대사 이야기가 만들어지겠구나 정도의 심정이었어.  하지만 이렇게 가슴 뜨겁게 만들어 전 세계에 보여주니, 한일 역사 논쟁에서 한국인의 피해의식을 운운하던 일본인이나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는 한국 내 친일세력들이 이 미국 감독에게는 별 말을 못 하고 끙끙 앓을 거라는 느낌과 세계인들이 비로소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느끼는 통쾌함이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느끼는 또 하나의 후련함이었지.


  내가 파친코를 보며 느꼈던 특별한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그 시절의 모습을 과장이나 어색함 없이 실제 그대로 가져온 듯한 배경과 소품, 인물 설정이 눈에 들어왔다. 묵은 때가 군데군데 묻은 누런 이불과 낡은 살림살이들, 거칠고 꾸깃꾸깃한 옷가지들, 부산 영도와 일본 오사카의 작은 골목과 시장 모습이 타임머신을 탄 듯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잘 표현되었다. 그 속에서 화장기 전혀 없이 거친 피부와 흐트러진 머리결 등이 배우가 아닌 인물 그 자체였다. 또한 뻔하지 않은 배우들과 자연스러운 연기력이 참 좋았다. 한 명, 한 명 오디션을 거쳐 뽑은 배우들답게 실감 나는 연기력과 실제 이름도 모르는 다수의 낯선 배우들이 많아 훨씬 드라마 속으로 쉽게 몰입되었다. 두 번째는 노래였다. 노래만큼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도 드라마 배경 음악이 아닌 실제 배우들의 노래였다. 배경 음악은 드라마의 내용을 극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사건 속에 갑자기 등장하여 오히려 현실성은 떨어뜨린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배경 음악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가 사실상 배경 음악 역할 이상을 수행하며 극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극도로 올린다. 먼저, 일제의 폭정에 대한 불만을 술자리에서 잠깐 말했다는 이유로 끌려가는 한 민중의 뱃노래가 있다. 그 남자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끌려가다가 주인공인 아이 선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고 갑자기 <뱃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극의 내용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비장하거나 슬픈 배경 음악을 깔았다면 관객들에게 이런 감정을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한 조선인 성악가가 부르는 춘향가 한 대목도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인 고관대작들 앞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으로 차려입은 조선인 성악가는 아름다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서양의 오페라를 부르다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는 걸쭉한 목소리로 춘향가의 <갈까부다>를 부르기 시작한다. 곧 죽을 날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힌 춘향이가 이도령을 그리며 부르는 이 노래처럼 이 성악가는 이 노래를 자신의 마지막 노래로 삼아 뜨겁게 부른다. 여기서 가슴 벅찬 것은 그 배의 밑바닥에서 일본에 광부 일을 하러 가는 수백 명의 조선인이 그 노래에 맞춰 벽을 치며 박자를 맞추는 장면이다. 흔들거리는 배 밑바닥에서 두렵고 낯선 일본으로 떠나며 뱃멀미로 힘겨워하던 그들의 귀에 갑자기 들리는 우리의 민요에 그들 모두가 하나 되어 벽을 쿵쿵 치는 소리가 어떤 배경 음악보다 더 크게 마음을 울렸다.  또 하나의 노래는 지진으로 흔들리는 오사카의 어둡고 값싼 술집에서 불리는 노래 <희망가>이다.  지배국 일본에서 피지배 국민으로 무시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노래한다. 처음에 누군가 술에 취해 이 노래를 부르고 이어서 모두가 따라 부른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노래 모두가 조선의 노래인데, 미국인들은 이 노래의 감성 어디쯤에서 그들의 마음이 맞닿는지 궁금하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엔딩에 등장한 ‘life is endured’처럼 그들의 삶은 역사 속에서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었고, ‘자신의 아이를 어떤 더러운 것이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드라마 속 말처럼 자식을 지키기 위해 견뎌내는 그들의 삶이자 우리네 부모의 삶이 바로 파친코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밥만 하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