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란게 있었다. 긴 밤 잠은 안 오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던 시절,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이미 손주에게 할 이야기는 다 해버린 터라 어쩔 수 없이 일단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본다. 이렇게 뜸을 들인 후 다음 이야기를 대충 구성한다. 한 명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꼬부랑 할머니가 한 명 살았는데.'하고 말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가물가물 떠올리며 얼개설개 이야기를 만든다. 손주는 비슷비슷한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밤을 보낸다.
지금의 손자들은 옛날이야기를 들을 시간도 없고, 볼거리가 넘친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흥부 놀부’, ‘콩쥐 팥쥐’, ’ 선녀와 나무꾼’ 등 내가 어렸을 적에 잘 알던 이야기들을 아는지 물어보면 절반 이상이 잘 모른다. 아는 아이들도 책이나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보았다고 하지 누구에게 들었다고 하지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지겹도록 들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도 이런 <옛날이야기>가 저물고 대략 <책의 시대>에 놓여 있었다. 지금처럼 아무도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신문명 같았던 책을 좋아했고 귀했고 그래서 열심히 읽었다. 집에 아주 작은 브라운관 tv가 한 대 있었지만, 감히 채널을 돌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볼만한 프로그램은 하루에 한 시간 될까 말까였다. 그것도 프로 야구나 씨름 경기처럼 스포츠가 있으면 취소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친구 집이나 만화방에서 빌려온, 또는 집에 어쩌다 굴러다니는 소설이나 만화책 등을 읽었다. 하지만 금방 다 읽고는 읽을 책이 없어 아쉬워하곤 했다. 그 시절 도서관은 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상과 sns의 시대이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tv 만화를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주 어린아이들만이 보는 편이다. 원하는 유튜브 영상과 넷플릭스 영화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대이다. 볼거리는 이처럼 넘쳐난다. 각종 sns에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고 그것만 쳐다 보아도 한, 두 시간은 뚝딱이다. 이야기의 시대와 활자의 시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동네마다 도서관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책장 가득 많은 책들로 독서 환경은 완벽히 갖추어졌다. 어른들은 독서를 외치며 아이들을 설득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 스스로 책을 펼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도 시대적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책을 몇 장 만 읽어도 몸이 근질거리고 집중력이 흩어져, 결국 휴대폰을 들게 된다. 유튜브와 각종 sns도 기웃거렸지만, 웬일인지 내게는 흥미가 안 생겼다. 그런 내가 정착한 곳이 트위터 세상이다. 이야기와 책의 냄새를 맡으며 자란 나에게 여기는 아직 이야기와 책의 냄새가 남아 있다. 사람들이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와 세상의 이야기를 한다. 갑갑한 나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세계의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책의 냄새였다. '지금 어디에선가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이 있었고, 어떤 동물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이곳은 이야기 창고이다. 신문, 방송과 같은 공공의 매스 미디어조차 담아내지 못하는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한 명, 한 명의 트위터들이 쌓아가는 이야기의 장에는 유머도, 독설도 있다. 기쁨도, 슬픔도 있다. 위로도, 공감도, 연대도 있다. 심지어 비난과 고소, 고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의 글을 데스크의 손에서 가공되어서야 알 수 있었던 세상의 소리가 간접적이라면, 나와 같은 직업군과 같은 관심사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날 것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들려주는 직접 민주주의의 장이 되는 곳이다. 그 목소리들에 동의하거나 반박하면서 세상의 진실을 한 꺼풀 벗겨보기도 하고, 한 겹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얼마 전, 만 5세의 입학 이야기가 처음 뉴스에 나왔을 때, 다른 어떤 곳보다 트위터에서 먼저 들불처럼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그곳의 사람들이 의견을 모으고, 확장하면서 거대한 담론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누군가가 서명운동 링크를 열었고, 사람들은 서명 운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이제, 물결의 시대로 바뀌었다. 작은 이야기가 큰 물결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 물결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뉴스를 통해 나오는 여론보다 조금 더 빠른 움직임이 여기서 보인다. 김수영의 풀이란 시처럼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을 보고 있다. 트위터에서 제기된 의견은 빠르게 여론화되면서 인터넷 서명운동으로 이어지고 현실의 여론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게도 되었다. 다음에는 우리에게 어떤 시대가 펼쳐질까? 제발, 우리의 이야기가 지금처럼 확장되고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