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사고하는 인간에게는 열린 기회이다.
1980년대였던 나의 중학교 입학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듯이 나는 영어라는 언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 어디선가 주워들은 알파벳을 노래하듯이 순서대로 줄줄 외우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실 영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영어의 신세계로 들어서는 중학교 1학년 첫 영어 시간이 되었다. 기대 가득한 두근거림으로 맞이한 영어 수업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낯선 모습의 소문자 a였다. 내가 언듯 알고 있고, 영어책에 분명히 찍혀 있는 소문자 a와는 그 모양이 사뭇 달랐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선생님이 칠판에 쓴 것은 필기체식의 소문자 a였고, 내가 교과서에서 본 소문자 a는 인쇄체 a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그 차이가 그때의 나는 영어의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진 듯 당황 그 자체였다. 알파벳을 따라 쓰라는 선생님의 말에 유독 교과서와 다르게 쓰인 a에 망설임 끝에 교과서 모양대로 a를 그리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한 동안 선생님이 쓰는 모양과 다른 a를 그리며 찜찜해했었다. 왜 다른 알파벳은 교과서 모양 그대로인데, 유독 a만 선생님이 쓰는 것과 교과서가 다른지를 감히 물어볼 생각을 못했다. 모든 아이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하게 넘어갔기에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던 소심함 가득한 아이가 나였다. 그리고 얼마 뒤, 필기체 영어가 등장하며 대략 그 a가 필기체임을 알았지만 왜 선생님이 a만은 그렇게 인쇄체에서도 필기체 형태로 쓰는지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두 번째 만난 난관은 필기체라는 또 다른 미궁이었다. 이건 따라 그리기가 상당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요상한 모양을 삐뚤빼뚤 따라 그리며, 왜 알아보지도 못하는 이런 필기체를 써야 하는지 궁금했으나 이도 감히 물어볼 생각을 못했다. 이런 답답함으로 시작한 내 1학년 영어 수업으로 인해 나는 시작부터 영어와 조금씩 멀어졌다.
영어 선생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라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중 1학년에게 그런 소소한 것까지 이상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친절하지 않은 영어 수업으로 인해 여러 상황에서 당황하는 일이 있었다. 숙어, 발음, 엑센트, 대화문 등의 의미에 대해서 나는 뭔가 잡히지 않는 알쏭달쏭함으로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다. 예를 들면, 발음기호의 중요성을 몰라서 mystery를 '마이스트리'라고 읽거나, often에서 t를 묵음으로 안 읽어서 선생님에게 지적을 받았다. 또 문장 구조에 대해 무지하여 듣기 평가에서 they를 day로 착각해서 낙제점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영어 발음에 대한 자신감도 사라진 나는 한껏 혀를 굴리며 영어 발음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영어 읽기 우수자들에게 기가 죽었다. 그렇게 나는 우왕좌왕하다가 영어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다 놓쳐 버렸다.
그러자, 자연히 영어보다는 내가 잘 이해하는 국어와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욱 많아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영어 쪽은 맹탕인 반쪽 우등생이 되어갔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영어와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수십 년 전 비싼 영어테이프를 방문판매로 커자란 박스채로 비싸게 사서 보관만 하다 버리기도 하고, 서점에서 유명한 영어 초보 탈출 책과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영어와는 담을 쌓은 채 살기로 한 내가 불혹의 나이가 넘어서 요즘 영어 공부 재미에 빠지게 된 것은 의외였다. 우연히 알게 된 영어 공부 앱을 깔아서 매일 조금씩 영어 공부를 했는데 처음으로 영어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고 몇달동안 꾸분하 하고 있다. 하루도 안 하면 뭔가 허전하다. 딱 내가 원하는 수준과 내용이면서 내가 원하는 만큼만 할 수 있어서 부담이 없다. 여전히 영어 초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작은 취미처럼 그 시간이 즐길 만하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그 시절 내가 스마트폰이나 유튜브처럼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처음 접한 그 당시 영어가 그처럼 당황스럽고 낯설게 느껴져서 결국 손을 놓아버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스마트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적 정보의 습득 기회는 많아졌다. 하지만 모두가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사람들은 지식과 멀어지고 있으니까. 예전보다 기회가 많아졌다면, 또 다른 유혹도 그 이상 커졌으니 말이다.
기술의 발전은 사고하는 인간에게는 열린 기회이지만, 의지가 약한 인간에게는 시간의 블랙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