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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13. 2022

사랑의 타이밍은 항상 어긋난다

  엄마와 같이 살 때 나는 정말 밥 먹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집밥을 먹든, 식당에 가서 먹든 항상 육고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지 않은 채소 또는 해물, 생선 요리만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식당은 의외로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서 기껏해야 백반집, 아귀찜, 생선구이집, 국숫집 정도 내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 보면 항상 가는 식당만 가게 되는데, 나는 자장면도 먹고 싶고, 돈가스도 먹고 싶고, 요즘 잘 나간다는 퓨전 식당도 가보고 싶었지만, 항상 같이 다녀야 하는 엄마 때문에 나의 식사 메뉴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요양원으로 가신 이후, 나는 더 이상 식사 종류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나는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싶은 메뉴를 마음껏 먹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들이 당기는 것이 아닌가. 엄마와 수시로 가던 근처 멸치쌈밥집, 자주 가서 정말 지겨웠던 아귀찜 집, 그리고 매일 집에서 먹던 그저 그런 나물과 생선 요리들. 그 시절에는 이런 것만 먹어야 하는 게 너무 싫었는데, 이젠 이런 음식들이 왜 이리 자꾸 당기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느낀다. 사실 나의 입맛과 식성이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그렇게 먹기 싫었던 그 음식과 반찬들이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엄마와 그 음식을 먹을 때 내가 투덜대지 않고 맛있다며 같이 웃어 주었다면, 맨날 이런 식당에만 온다고 인상 찌푸리지 않고 즐거워했다면 서로 얼마나 좋았을까.


  사랑은 흔히 타이밍이라고 한다. 그런데 항상  타이밍은 어긋나기 마련이고, 지나간 사랑은 아쉽고 그립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사랑은 연인의 사랑보다  타이밍이  맞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은 가늠할  없을 만큼 크다고 하지만, 자식의 사랑이  절대적이고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식이 어릴 때이다. 유아기의 자식은 응석과 울음으로 부모에 대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를 표현하지만, 부모는 그걸 사랑이라기보다 보살펴야 하는 힘든 존재로 느끼기 쉽다. 어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희생적이고,  자식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항상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어린 자식이 가지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생존 본능이라  수도 있지만, 부모 또한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종족 보존의 본능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의 본능에 충실하면서 각자의 다른 표현으로 사랑하기에  사랑은 충분히 전달되고 즐기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나이가 들면, 자식은 성장하고 부모는 늙는다.   자식은 이제 자신의 , 가정에 대한 몰입과 독립심으로 부모에 대한 사랑과 의존이 현저히 줄어든다.  늙은 부모는 육체와 정신이 예전만 못한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자식에 대한 의지와 기대감으로 전환되면서 점점 어린 마음이 되어 간다.  어린 마음은 섭섭함이 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심하면 집착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의 사랑은  어긋난다.


 세월이  흘러, 자식도 늙은 부모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부모의 늙으심을 돌아보게 되고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 보고자 하지만, 부모는 신체와 영혼의 힘을 잃어 어린 시절 자식의 모습이 되어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나간 세월이 야속한 자식의 회한과 그런 자식을 알아보는 것조차 힘겨운 늙은 부모는 그렇게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다.


이렇게 놓쳐버린 사랑의 타이밍이 너무 슬프고 어리석은 자식이었던 다가올 미래 자식과의 타이밍만은 놓치지 않겠다 생각하지만, 웬걸 벌써부터 자식이랑 엇갈리는 감정들이 쌓이기만 하는 요즘에 이것이 말처럼 쉬울지  역시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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