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가족들과 외식을 하러 갔다. 제법 유명한 맛집인 식당에서 안내된 자리는 작은 방이었고, 그곳에는 이미 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웠다. 우리가 아주 화목한 가족인 것처럼. 사실 요즘 많이 어색한 두 부자의 관계를 풀어주려는, 나의 성향과는 맞지 않는 노력이라 하겠다. 우리의 옆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도 우리 집과 같이 50대 전후의 부부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로 보이는 아들로 된 구성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고기를 구워 먹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가깝게 앉아 있다 보니 대략 몇 단어가 들리기를 '3학년', '수시 모집', '모의고사'인 걸로 아들이 내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제법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가족 외식을 하는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져, 오늘 아침에 봤던 유튜브의 역사이야기를 중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주렁주렁 풀었고, 1년여간 냉전과 열전을 오가며 분위기가 대면 대면한 두 부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어서, 나 혼자의 원맨쇼를 계속 진행하였다. 잠시 후 옆 테이블 손님들이 나가자, 남편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크고 말이 많냐고. 흠, 내가 말이 많다는 소리를 다 들어보고. 내가 원래 이런 컨셉 아닌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졌겠냐고, 너희 둘이 얼마나 서로 말을 안 하면 내가 이렇게 되었겠냐고, 물론 둘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더 무섭지만.
잠시 뒤에 또 다른 일행이 방으로 들어왔다. 건장한 남자 셋과 10대로 보이는 여자 한 명. 무슨 관계일까? 약간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나는 계속 밥을 먹었다. 그중 한 남자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10대의 여자에게 화를 내듯 소리를 치며 말하는데 그 시끄러움이 나를 능가했다. 너는 왜 그렇게 돌아다니냐, 공부는 언제 하냐, 등등 이런 비슷한 이야기였다. 음식을 주문할 때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시키던 그 남자의 목청에 나는 그만 조용히 밥을 먹기로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계속 명령조로 화내듯 말하고 있었다. 결국 여자에게서 날카로운 한마디가 날아왔다. "아, 정말!, 1절만 해. 1절만 하라고."
사흘 건너 한 번씩 싸우는 우리 집 두 부자도 이런 센 말은 오간 적이 없다. 아들은 남편에게 땍땍거리기는 하지만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한 적이 없다.
여자 아이의 당돌한 말에 불도저 같은 저 남자가 폭발하는 게 아닐까 나는 긴장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남자가 갑자기 작아진 목소리에 애교를 섞은 말로.
"아이, 알았어, 우리 딸. 그러니까. 아빠는 …."
여전히 높은 억양이지만 남자의 사랑 가득한 말을 들으며 나는 긴장했던 나 자신이 웃겼다. 그리고 여전히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우리 집 두 남자를 보았다.
이들에게는 저런 극적인 기승전결이 없다. 처음 남편이 잔소리나 걱정을 아들에게 하면, 아들은 자기 나름의 이유를 대며 잔잔하게 반박한다. 그러면 남편은 그 이유의 잘못된 점을 또 다박다박 반박한다. 둘은 그렇게 잔잔히 그리고 조용히 말로 한 시간 이상 싸운다. 아주 편안한 목소리와 긴 말로 대치한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어가면 서서히 남편의 언성이 올라간다. 아들은 여전히 담담히 받아친다. 그러면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아들은 조용해진다. 이걸로 두 시간 정도의 대토론회는 파장한다. 역시 새드엔딩이든, 해피엔딩이든 엔딩이 있는 드라마가 재미있지, 결론 없이 기기승전으로 끝나는 이런 100분 토론은 재미도, 감동도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래도 맛있는 걸 먹어서인지 둘 사이에 예전과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가 흐르는 대화가 잠시 이어진다. 이것도 잠시, 그 분위기가 좋아서 주책없이 내가 거든 말이 화근이 되었다. 진로를 고민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좋지, 그러려면 스펙이 필요하지, 예를 들면 영어라든가.' 나의 이 필요 없는 한 마디에 아들은 '영어가 중요한 곳도 있지만 기본만 하면 되는 곳도 많아. '라고 말했다. 나는 얼른 불을 끄기 위해,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네. 맞아.'라고 수습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바로 남편이 태클을 건다. "무슨 말이야. 요즘 세상에 영어는 무조건 잘하고 봐야지."
아들은 절대 안 진다. "내가 다 알아봤는데, 00 같은 곳은 영어가 중요하지만, $$같은 곳은 간단히 이메일 정도만 쓸 줄 알면 돼."
이제 또 시작이다. 둘은 한 시간 가까이 차 안에서 조용한 설전을 벌인다. 이러다간 또 파국이다. 둘이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에 내가 버럭 짧은 한 마디를 했다.
"둘 다 1절만 해."
아들은 순간 픽 웃었고, 남편은 '아, 왜 재밌잖아." 하며 머쓱해했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돌렸다.
어떤 중재의 말과 하소연도 안 통했던 이들에게 이런 우스개 소리가 약이 될 줄이야.
그래, 우리는 그동안 너무 진지한 가족이었어. 무슨 학자나 박사인 것처럼, 세상 문제를 다 풀려는 사회학자나 경제학자처럼 자기 말만 주구장창했던 거야. 이럴 땐 예의바르고 마른 말보다 이렇게 그냥 씹던 껌을 뱉듯, 이 토론의 감옥에다가 세속적인 말 한마디 툭 던져주는 게 더 나은 거였어.
"그러니까 둘 다 제발 이제 1절만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