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구하는 실천가 Nov 26. 2022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나부낄 때

겨울을 앞두고 주절거리다

    언제부턴가 벽 달력이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있는 달력인 탁상달력은 달력의 기능보다 메모장 정도 되겠다. 예전에는 연초가 되면 각 가정에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듯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방마다 신년 벽 달력을 걸었었다. 그렇게 걸린 벽 달력은 세월의 시계추가 되어 한 해동안 일 년의 끝을 향해서 재깍재깍 나아갔다.  또 집안의 대소사에 따라 특정 날짜에 빨간 동그라미가 커다랗게 둘러쳐지거나 날짜 밑에 손글씨로 주요 가족 행사명이 적히며 가족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매달 초 한 장씩 달력을 떼어낼 때면 세월의 한 자락을 베어낸 마음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는 작은 철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은 마지막 잎새 같은 아련함으로 12월의 달력 한 장만 덩그러니 남게 되면 달력은 살랑거리며 바람에 나부낀다. 분명 바람 한 점 없는 방안인데도 세월이 묻은 달력 한 귀퉁이가 바람에 나부끼듯 살짝 말려 올라가 있기 때문일까. 방음과 방한이 허술한 옛날 스레트 집의 얇은 벽 뒤로 차갑게 불어대는 바깥의 바람 소리 때문일까.


  그래서 내게 떠오르는 옛 겨울의 이미지 중 하나는 12월의 달력 한 장이다. 차가운 울음소리를 내는 겨울 밤거리와 고작 시멘트 벽 하나를 맞대고 대치하는 한 장 남은 달력은 한 해의 저묾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외롭고도 따뜻한 존재였다.

  

   젊은 시절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았다.  얇은 옷에 비친 내 몸의 굴곡처럼 여름 햇살 아래여서 더욱 도드라진 외로움의 그림자는 컸었다. 목도리와 외투 깃에 움츠린 목을 깊이 파묻고 바람만이 가득한 해안 도시를 걸어서 온기 있는 집으로 잰걸음 하는 겨울이 오히려 따뜻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겨울이 점점 싫어지는 중이다. 나이가 들면 온기 있는 집보다는 온기 있는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탓일까? 좀 더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이 커지는 것 같다.


   올 가을은 유난히 길었다.  그래서 제법 길게 단풍을 보았고, 제법 오랫동안 떨어지는 낙엽길을 걸었다. 여름과 겨울의 간극을 견디기에 충분한 가을이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은 덜 외로울 것이다. 한 장만 남을 내 마음속 달력도 창 밖의 추운 바람 소리에 잠시 흔들릴 뿐 여전히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그래서 이번 겨울 나는 많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겨울이라 더 외로울 그 누군가도 긴 가을 뒤에 남긴 마음속 달력 한 장의 나부낌으로 겸허히 세월을 위로받으며 따뜻하길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듦이 주는 변화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