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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03. 2018

어린 시절의 결핍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굿윌 헌팅]이란 영화를 보았다. 워낙 오래된 명작이라 제목은 들어 봤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앞부분은 지나가 버렸지만 보게 되었다. 내용은 대략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윌이란 청년이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학대로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는 내용다. 실제로 어린 시절의 결핍은 그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지배하게 다.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하는 윌

  요즘 아이들은 감정 표현이 분명하다. 좋으면 까르르. 싫으면 씩씩!! 슬프면 엉엉!

 하지만 내가 아는 두 아이는 감정 표현이 없다. 그중 A누가 자신에게 잘못을 하거나 함부로 말해도 약간 놀란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별 반응이 없다. 그리고 주어진 일이 많거나 적거나, 힘들거나 상관없이 묵묵히 해낸다. 다른 아이들은 조금만 힘들거나 불편해도 감정 표현을 바로 하는 것에 비해 말이다. 그런 A에게 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주 말을 건다. (모든 일을 공정하게 하기란 너무 어렵다. 선착순이나 자율성을 부여하면 A처럼 내성적인 아이들이 조금씩 손해를 보게 된다.)
"아침 먹었니?"
"수학 어렵지 않니?"
그러면 A는 대개 대꾸가 없거나 수줍은 듯, 무심한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A에게 더이상 말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A가 어느날 내 말에 흐릿한 웃음을 보였다. 이렇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A는 아빠와 할머니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다. 엄마는 동남아시아 사람인데 이혼한 것으로 보인다.  아빠는 일하느라 바쁘고 할머니는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분은 아닌 것 같다. 다행히 근처 고모가 살고 있어서 A를 챙겨주고 있다.  A의 이런 심한 소극성은 엄마의 결핍에 기인한 게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아이 B가 있다. B의 어머니는 일을 하느라 밤늦게 들어오고 누나도 고등학생이라 밤늦게 들어온다고 한다. 아버지는 들어오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B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에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B는 밤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B1학기때는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다는 이유로 수업의 절반을 보건실에서 보내더니 2학기에는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거나 아예 교과서도 꺼내지 않기 일쑤이다. 부모님께 상담을 요청해도 연락이 잘 되지 않거나 바쁘다는 문자만 온다. 며칠 동안 남겨서 가르쳐 보려고 해도 교과서만 들이대면 온 몸이 돌이 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과의 소통도 잘 되지 않아 혼자 있거나 1~2명의 특정 아이와 싸움놀이 같은 단순한 놀이를 하는 게 전부이다. 하루는 돌처럼  B와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해 보았다.  이런, 저런 말에도 대답을 않던 B가,

 "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 "라는 나의 유치한 질문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 아, 둘 다 똑같이 좋아?"

 또 대답 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 두 분 다 안 좋니? "

 끄덕끄덕하는 아이의 코에서 콧물이 흐른다. 눈물처럼.

그 후에도 몇 가지 질문에 짧게나마 대답을 해 주었고 수업시간 태도에 대해 간단히 약속을 하고 집으로 보냈다.

 B를 보내고 나서 생각했다. 어쩌면 B와 내가 해야 할 일은 개별 학습 지도가 아니라 개별 마음 나누기란 걸. B의 수업태도가 엉망인 게 학습의 문제가 아니라 둘 곳 없는 마음의 문제란 걸 말이다. B의 결핍은 가족의 사랑일 것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결핍이 있었다. 가난이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창 아파트가 대규모로 지어지고 있던 곳이다. 아무 생각 없던 나는 그 아파트와 그 아파트의 멋진 놀이터를 보고 나서 내가 제법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그 아파트 놀이터의 그네를 타면서 생각했다. '너는 참 좋겠다. 매일 이런 그네를 탈 수 있으니.'

 그 시절 가난했던 아이는 나뿐이 아니었지만, 나는 유독 그런 것을 의식했던 소심한 아이였다. 나의 이런 철없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물질의 결핍을 겪은 나에 비해 지금 A와 B가 겪는 마음의 결핍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떤 결핍이든 어린 시절의 결핍은 마음의 흉터로 남을 것이다. [굿윌 헌팅]에는 션이라는 심리학교수와 램보라는 수학교수가 등장한다. 션은 윌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주지만, 램보는 그의 재능만을 깨우고 이용하려 한다. 나는 A와 B에게 부족한 부분을 자꾸 확인시켜서 바꾸려고 하는 램보같은 교사가 아니었을까? 부끄럽게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 아이들의 결핍으로 인한 결과보다 그 결핍의 상처를 먼저 보았어야 했다. 그것을 어루만져주어야 했다. 이제 몇 달이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들에게 교사이기 전에 엄마 같은 그리고 친구 같은 존재로 다가가야 한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를 계속 외치는 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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